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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등록일 2015년06월04일 18시20분

여백

 직장이 없으면 마냥 여유로울 것 같은데 정작 그렇지만은 않다. 계획된 일정을 수없이 바꾸게 된다. 예상치 못한 부고나 사고, 자질구레한 일로 발목이 잡힌다. 무얼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짜증이 난다. 이럴 때면 하던 일 모두 접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마침, 인근 강변에서 만나자는 메시지가 왔다. 여행을 좋아하는 모임에서 갖는 번개 모임이다. 답답함을 비워낼 좋은 기회다. 나처럼 내면 깊숙이 내재한 일탈의 욕구가 발동한 것일까. 햇살이 꽤 강렬함에도 제법 많은 회원이 약속한 듯 모여든다. 4대강 사업으로 강은 원형이 훼손되긴 했지만, 곳곳에 휴식공간과 자전거도로가 생겼다. 다행히 이곳은 달성습지가 있어 중장비의 삽날을 면한 곳이다. 호수 같은 강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좋다. 풍광은 마치 여백을 남겨둔 화선지에 그린 듯 단아하다.

 고려 말, 선대 할아버지가 삶의 터전을 잡았던 곳이 바로 부근이다.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쓰고 있어 더욱 애착이 간다. 이곳을 사랑한 낙재(樂齋)할아버지는 경치를 시문으로 노래했을 정도다. 강물을 거슬러 천천히 둑길을 걷는다. 어릴 적, 먼지가 폴폴 나는 길이 놀이터였기 때문인지 흙길에 정감이 간다. 발바닥에 전해 오는 촉감이 좋다. 새들이 내려앉은 백사장은 채색하지 않아도 곱다. 연신 쏟아내는 웃음에 일행들의 발걸음도 가볍다. 습지에는 제멋대로 돋아난 갯버들이 갈대와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다. 길섶 이름 모를 야생화도 노랑 웃음으로 교태를 부린다. 강변 풍광에 녹아들수록 내 마음은 풍성한 빛깔로 채워진다.

 한참을 걷자 강정보 디아크(The ARC)가 위용을 드러낸다. 4대강 보 중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다. 갈대와 버들의 요람이던 도류제는 원시의 모습은 잃었지만, 인공으로 조성된 나무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뭇가지에는 어디서 몰려왔는지 먹구름이 듬성듬성 걸린다.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거친 강바람까지 몰려든다. 걷는 걸음을 바람이 막아선다. 한발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이렇게 더딜 줄이야. 아예 뒷걸음으로 걸어보지만 속수무책이다. 목적지까지 한참을 걸어야 하는데 난감해진다.

 몇 년 전 태풍경보가 내려진 그 날이 떠오른다.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바람은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불었다. 수문을 점검하기 위해 맡은 구역을 순찰 중이었다. 힘겹게 바람을 뚫고 가다 결국 논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겨우 빠져나오긴 했지만, 힘으로 맞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를 호된 경험 후에야 터득했다. 식당까지는 한참을 걸어야했다. 바람이 멎을 때까지 쉬어가기를 제의했다. 대열은 반분되어 몇 명은 전진을 감행했지만 몇 명은 바람의 횡포가 잠잠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 후, 거센 바람은 거짓말처럼 휭하니 떠나갔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둑길을 다시 걷는다. 강물은 밀려오는 산 그림자를 반쯤 안고 흐른다. 수면 위 남아 있는 빛도 자취를 감춘다. 이년 전, 청암사 산사음악회가 끝난 후에 느꼈던 그 고요함이 전신을 휘감는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하늘은 짙은 회색으로 변한다. 황홀한 석양마저 바람이 몰고 간 후라 느긋한 걸음으로 걷는다. 일행과의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혼자가 아님에도 혼자인 듯 어둠에 자신을 가둔다. 달리 까닭이 있어서도 아니다. 괜히 외톨이가 된듯하다. 함께 떠들고 즐기기 위해 나온 것인데 까닭 없이 마음에 무게만 더해진다. 비워내지 못함은 여유가 없어서일까. 백수만이 겪는 스트레스일까. 연유를 모르니 답답해진다.

 공직에 몸담고 있을 때는 매사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어떤 일이든 두렵지 않았다. 늘 자신이 있었다. 하고자하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매주 한 번,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으로 내실을 다졌다. 좌절은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멈춤이라 생각했다. 일이 좋았기에 육체는 고되지만 마음만은 여유가 있었다.

 식당 마루에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흰색 바탕에 황토색과 녹색뿐인 단조로운 구성이었다. 그림 가운데만 도드라지게 물감이 채색되었을 뿐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둔 채로였다. 보잘것없는 그림 같았다. 궁금증이 더해져 다가갔다. 그림 아래에 ‘순수와 투명이 이뤄낸 조화로움, 그 여백이 주는 심리적 안정이 돋보이는 작품’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설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내심 비웃었다. 평론가의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행사의 대미는 노사연의 ‘만남’으로 마무리 짓는다. 언제 불러도 좋다. 함께 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뚝 길을 걷는 동안 취할 수 있었던 여유로움을 떠올린다. 습지는 버들과 갈대로 다 채우지 않고 넉넉한 여백을 남겼다. 잔잔한 강물과 더 넓은 하늘과 푸른 숲에 녹아 든 것도 여백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품었던 어두운 생각을 지워본다. 의외로 홀가분해 진 느낌이다. 어쩌면 무거워진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빼곡하게 채워진 일상을 여백으로 남길 때 여유로워질까. 풍광처럼, 그림처럼.

 *디아크(The ARC : Architecture of Rive Culture, 강문화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건축물과 예술품)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前 달성군 안전행정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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