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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천의 용사일록

등록일 2013년12월04일 23시12분
정광천의 용사일록
 
 용사일록(龍蛇日錄)은 낙애 정광천(鄭光天) 선생이 임진왜란 당시를 기록한 일기이다. 낙애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6개월이 지난 1592년 10월 17일부터 1593년 11월 21일까지 다사읍 문양리 용두골 마을에서 왜적을 피해서 가족과 함께 낙동강을 건너 고령군·합천군·거창군으로 피난을 다니며 끔찍하고 비참한 광경을 일기에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것은 일본의 1차 침입이 임진년(1592)에 일어났으므로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2차 침입은 정유년(1597)에 있었으므로 정유재란이라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 하면 일반적으로 정유재란까지 포함시켜 말한다. 올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421년이 되는 해이다.
 낙애 정광천(洛涯 鄭光天, 1553~1594) 선생은 다사 출신으로 자는 자회(子晦) 호는 낙애(洛涯) 또는 송파(松坡)이며 본관은 동래(東來)이다. 한강 정구(鄭逑) 선생의 문인으로 낙동강 물가에 아금정(牙琴亭)을 짓고 강호에 살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저서로『낙애선생문집』이 전한다.
 선생은 1592년 10월 18일 일기에서 “일가와 함께 무계(고령군 성산면)역을 지나다. 왜적이 지나간 곳은 동굴 속마다 백골이 산같이 쌓였고 피비린내가 코를 막지 않을 수 없다. 도중 20여리는 동네마다 집들은 모두 불타버렸고, 그 처참함은 차마 볼 수 없었다.”라 적고 있다.
 1592년 10월 29일 일기에서는 “성주에 침입한 왜적의 행패가 극성스러워서 우리가 피난 온 곳까지 곧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 아침 일찍 출발하다. 이학가(이종문)와 더불어 종일토록 도보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으며 돌밭 길에 고생도 많았다. 어둠을 무릅쓰고 넘어지고 엎어지곤 하여 겨우 내곡촌(고령)의 피난 집에 도착하여 아버님을 뵈오니 새벽닭이 울려할 때였다. 피난 생활의 고초를 어떻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극히 고생스럽다.”라 적고 있다.
  1592년 11월 3일 일기에서는 “저녁에 노비가 하남(다사)으로부터 오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두머리 노비 목산과 그의 아들 몽손이 모두 병사하고 몽손의 어린 아들은 왜적에게 피살되어 아무렇게나 묻었고, 이미 곡식은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모두가 이러하니 앞으로 조상을 섬기고 자손을 양육하는 일이며 신변의 잡다한 일들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가. 이미 위로는 나라가 망하고 아래로는 일가족이 산산조각이 났으니 근심과 번뇌만이 몸서리치게 하고 한숨만 크게 나올 뿐이다.” 라 적고 있다.
 절망속에서도 선생은 1594년 의소(擬疏)를 지어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수년간의 병란으로 피폐된 지금에 실로 두려운 것은 외적이 아니라 민심의 이반(離反)이라.”고 하면서 우리 군대와 명나라 원군의 수탈로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의 실정을 지적하고, 국가에서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써 국가의 기강을 확립할 것과 인재를 모아 왜적을 물리쳐야 함을 주장하였다. 선생의 의소(擬疏)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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