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교 아래, 잊혀진 시간의 강
1부. 청년 정주영, 파산의 위기에서 '신용'이라는 거인을 낳다
2부. 대가야의 영광과 선유문화, 도공의 한이 서린 '도진나루'
[제언] 잊혀진 역사를 '고령만의 에코뮤지엄'으로 되살리자
| | | 1934년 고령교 완공(겸산 김부일 대구민학회장). @고령군 | | |
[고령(경북)=더피플매거진]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건너는 낙동강의 고령교. 하지만 지금의 다리 이전에, 일제강점기에 세워져 전쟁으로 파괴되고, 한 청년의 피땀으로 다시 태어났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또 하나의 '고령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 다리가 서 있던 자리는 천오백 년 전 대가야의 '혼'이 흐르던 '도진(陶津)나루' 터다. 대한민국 산업화의 신화와 고대왕국의 영광, 그리고 조선 선비들의 풍류와 임진왜란의 비극이 층층이 쌓여있는 이곳. 잊혀진 도진나루의 위대한 이야기를 깨워, 고령의 새로운 미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1부. 청년 정주영, 파산의 위기에서 '신용'이라는 거인을 낳다 1935년 일제강점기, 고령과 달성을 잇던 도진나루 자리에 총 길이 300m, 폭 7m의 고령교가 당시 최첨단 공법으로 세워졌다. 하지만 이 다리는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무참히 파괴되었다. 1953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정부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등을 위해 이 다리의 복구를 서둘렀고, 당시 정부 발주 공사 중 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 사업을 30대 후반의 청년 기업가 정주영과 그의 현대건설이 따냈다.
| | | 한국전쟁 후 고령과 대구를 잇는 고령교 복구 공사를 현대건설에서 수주했다. @현대건설 | | |
하지만 현실은 참혹했다. 말이 복구공사지, 강물에 처박힌 구조물을 건져내는 일부터 난관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닥쳤다. 기름값은 3배 이상 폭등했고, 다른 현장의 막대한 적자까지 겹치며 회사는 금세 자금난에 빠졌다. 임금을 받지 못한 인부들은 파업에 나섰고, 사무실은 빚쟁이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모두가 끝이라고 말할 때, 정주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업은 망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인간은 한번 신용을 잃으면 끝장"이라는 신념 하나로, 그는 동생과 매제의 집까지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1955년 5월, 고령교는 완공됐다. 계약금 5,478만 환에 적자 6,500만 환. 회사 자본금의 스무 배가 넘는 빚더미만 남은 처절한 실패였다.
| | | 한국전쟁 후 고령과 대구를 잇는 고령교 복구 공사를 현대건설에서 수주했다. @현대건설 | | |
경쟁자들은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친구가 인플레이션 계산도 못 하고 덜컥 계약했다"고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이 공사를 '실패'가 아닌 '시련'이라 불렀다. 막대한 적자에도 끝까지 공사를 완수한 현대건설의 '신용'은 정부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는 훗날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를 수주하는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고령교의 악몽은, '신용'이라는 자산 위에 세워진 대한민국 대표 기업 현대그룹의 신화가 시작된 서막이었다.
2부. 대가야의 영광과 선유문화, 도공의 한이 서린 '도진나루' 청년 정주영이 눈물을 삼켰던 고령교 자리는, 시간을 천오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가야의 영광이 흐르던 곳이다.
| | | 1934년 고령교 착공전 화물과 사람을 실어나르는 나룻배(겸산 김부일 대구민학회장). @고령군 | | |
대가야 시대, 이곳은 국토를 방어하는 '최전선 군사 요충지'였다. 고령교 옆 나지막하지만 가파른 봉화산(말응덕산) 정상에는 보루가 있어, 낙동강을 오가는 모든 선박과 군사의 이동을 철저히 감시했다. 낙동강은 대가야의 교역로이자, 동시에 신라의 침공 루트이기도 했기에, 도진나루는 왕국의 명운을 건 전략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곳은 '도자기 나루'라는 뜻의 '도진(陶津)'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인근 사부리, 기산리 도요지에서 생산된 최상품의 도자기들이 이 나루를 통해 일본 등지로 실어 날라졌다. 도자기 교역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마을 주민들이 큰 이득을 얻었다 하여 마을 이름이 '득성(得成)'이라 불릴 정도였다.
| | | 1934년 고령교 착공전 택시3대 내리는 모습(겸산 김부일 대구민학회장). @고령군 | | |
최근 발굴된 '고령 합가리 토기가마유적'은 이곳이 단순한 생산지를 넘어, 국가가 주도하는 체계적인 토기 산업의 허브였음을 증명한다. 14m가 넘는 대형 가마와 동물 모양 토우 등은 당시의 높은 기술력과 예술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는 수많은 고령의 도공들이 이 나루를 통해 일본으로 끌려가는 '한의 뱃길'이 되기도 했다.
이곳은 상업과 전쟁의 역사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강 정구(鄭逑), 송암 김면(金沔) 등 당대의 대학자들이 교류했던 '낙강칠현(洛江七賢)'의 무대이기도 했다. 봉화산 정상의 사망정과 낙강칠현비는 이곳이 깊은 학문과 인간애가 오가던 품격 있는 선유문화 교류의 중심지였음을 증명한다.
[제언] 잊혀진 역사를 '고령만의 에코뮤지엄'으로 되살리자 비록 정주영이 재건했던 고령교는 1981년 새 다리가 건설되면서 폐쇄됐고, 2010년 낙동강 사업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지금은 그 물리적 형태를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신용'의 정신과, 그보다 더 깊은 대가야의 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제는 이 보이지 않는 위대한 이야기를 '관광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고령의 핵심 자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 | | 1934년 고령교 완공(겸산 김부일 대구민학회장). @고령군 | | |
다행히 고령군은 현재 개진면 개경포에 '낙동문화권 에코뮤지엄' 조성을 추진하며,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
도진나루를 이 '고령 에코뮤지엄'의 두 번째 핵심 축으로 세워야 한다. 개경포가 '대가야의 물류와 교류'를 테마로 한다면, 도진나루는 '대가야의 생산 기술(토기)'과 '대한민국 산업화 정신(정주영)'이라는 차별화된 테마로 그 스토리를 완성할 수 있다.
| | | 고령군 성산면 봉화산 봉수대와 낙동강. @고령군 | | |
‘정주영 기업가정신 기념관’ 건립, ‘대가야 토기 생산 복원길’ 조성, 도진나루 출렁다리와 전망대 등 체험형 명소는 지역의 숨은 역사와 이야기를 전국에 알릴 수 있는 훌륭한 콘텐츠가 될 것이다. 더불어, AR(증강현실) 등 첨단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청소년과 젊은 세대에게도 흥미롭고 교육적인 관광자원이 되길 기대한다.
한 지역의 역사는 그 자체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자산이다. 1,500년 대가야의 유구한 숨결과 대한민국 경제를 일으킨 거인의 도전이 어우러져, 이곳이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로 전국적인 관광 명소로 우리 곁에 다가오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