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西湖) 지역 강학, 문학의 중심지 용호서원
양직당(養直堂), 서재(鋤齋), 지암(止巖) 3현을 배향
서재마을 이름 변천, 도촌(島村) 도촌(都村) 서재(鋤齋)의 의미
이강(낙재)과 사수(한강)를 잇는 연결고리로 ‘서재문화’의 중심지
올 여름은 비가 참 많다. 낙동강과 금호강을 품고 있는 대구지역은 큰 피해가 없어 다행이다. 예전에는 물을 한가득 담은 금호강이 해낭개들, 달내들, 서재들로 들이치면 일대는 거대한 호수가 되었다. 이때 작은 섬 하나 생기는데 도촌(島村)이다. 말 그대로 작은 섬마을이다. 도촌은 달성군 다사읍 서재마을의 옛 이름이었다. 원래는 섬 ‘도(島)’자를 써서 도촌(島村)이라고 하였는데, 성주 도씨(星州都氏)가 입향한 후 도촌(都村)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 1571~1649),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1574~1640), 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 1598~1650) 3현을 배향한 용호서원(龍湖書院)이 자리하고 있다.
| | | 하늘에서 바라 본 용호서원. 멀리 금호강이 보인다 | | |
용호서원은 [대구부읍지](1899)에 따르면, “대구부(大邱府)의 서쪽 20리 하동(河東)에 있다.”라고 하였다. 현재 주소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본4길 18-27이다. 뒤로는 금호강이 흐르고, 와룡산 자락의 한 동산을 차지하고 있다. 금호강 건너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 선생의 이강서원(伊江書院)이 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이 만년을 보냈던 사수(泗水)와도 가깝다. 1704년(숙종 30)에 세덕사(世德祠)로 건립되었다가 1708년(숙종 33)에 용호서원(龍湖書院)으로 승격되었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용호서당(龍湖書堂)으로 개칭되었다. 성주도씨 문중 서원으로 1984년에 중수한 뒤, 1988년부터 향사를 재개하여 현재 매년 4월 5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도씨는 단일 본으로 옛 신라시대 수창군 4현의 중심지였던 팔거현(八居縣: 현 대구 칠곡(漆谷))의 지배 계층인 대표적 씨족집단이었다. 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 명망있는 지방 호족장인 도진(都陳) 건국공신으로 부원군에 봉하여짐으로써 관향의 시조가 되었으며 이로부터 팔거도씨(八莒都氏)로 통칭하였다. 1752년 대동보를 편찬할 때 종회의 결의로써 당시 팔거현이 속한 성주목(星州牧)의 지명을 따서 성주도씨(星州都氏)로 개칭하였다.
1540년대에 16세世 대종손인 경상좌도 병마우후 도흠조(都欽祖)가 와룡산록 이곳이 산수(山水)가 겸비하고 문물이 무난하다고 대구부 속현인 하빈면 도촌(島村)리에 정착하였다. 성씨와 음동(音同)으로 도촌(都村)이라 불리워지고 서재(鋤齋) 도여유公의 복록(福祿)이 좋아 서재공 마을로 일컬어지다가 이에 동명洞名으로 되었으며 500년을 이어 세거하여 왔다.
대구 대표하는 달성십현(達城十賢)에 오른 양직당(養直堂), 서재(鋤齋) 도성유(都聖兪 1571~1649)의 자는 정언(廷彦), 호는 양직당(養直堂), 도촌 입향조인 흠조欽祖의 장손(長孫)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병절교위(秉節校尉) 도원국(都元國, 1548~1592)과 인천채씨(仁川蔡氏) 어머니 슬하에서 1571년 8월 22일 하빈현(河濱縣) 도촌리(島村里)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송계(松溪) 권응인에게 배우고, 낙재(樂齋) 서사원, 한강(寒岡) 정구 양문에 수학하여 덕행과 문장으로 세간의 사표와 서재문운(鋤齋文運)의 개조(開祖)가 되었다. 22세 임진왜란 때 팔공산으로 피난하여 서사원, 손처눌, 이주(李輈) 등을 따라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공을 세웠다. 당년에 외간상을 치루었으며, 임란 후 잦은 국내외 전란, 정치적인 당쟁심화와 과제문란 및 광해군 패륜이 유학의 인의명분(仁義名分)에 맞지 않음에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독학하여 경서에 밝고 행동이 신중하며 덕망이 높았다.
금호(琴湖), 부강정(浮江亭) 등을 오가며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 1552~1619),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 1569~1634) 당시 지역 명현들과 교유하며 한강 문인 사단의 주축을 형성했다.
1615년(45세) 낙재 서서원 선생을 곡하고 이천서재(伊川書齋)를 맡아 경영했으며, 선생을 연경서원(硏經書院) 별사에 배향하려 했다. 1620년 한강 선생이 고종한 뒤로 와룡산 아래 정사를 지어 ‘양직(養直)’이라 편액하고 성리정학(性理正學)을 집필했다. 이후 1637년 청나라와 강화가 이루어지자 낙담하여 두문불출 은거하며 학문과 강학에만 힘썼다. 1639년(69)이 되어서야 낙재 선생을 위해 이강서원(伊江書院)을 세우고 서사원을 별도로 제향하여 스승에 대한 경(敬)과 의(義)를 다했다.
1649년 1월 30일 와룡정사(臥龍精舍,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 서재리 와룡산 기슭에 있는 양직당의 서재)에서 죽었고, 칠곡 오곡(梧谷) 조부의 무덤 아래 건좌(乾坐)에 안장되었다. 부인은 광주이씨(廣州李氏)로 후사가 없어, 종제(從弟)인 서재 도여유의 아들 휘헌 신여(愼與)를 후사로 삼았다.
대구읍지에 달성십현(達成十賢)으로 추앙되며 용호서원(龍湖書院)에 배향 되었다.
| | | 대종회 제사 공간인 치경당(致敬堂), 도형록 종무, 도재윤 사무장, 도석갑 대종손 | | |
도여유(都汝兪, 1574~1640) 자는 해중(諧仲), 호는 서재(鋤齋) 원결(元結)의 장자(長子)이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 정부인 부계홍씨(缶溪洪氏) 슬하에서 1574년 12월 23일 대구 하빈현(河濱縣) 도촌리(島村里)에서 출생했다.
백종형 양직당 도성유와 함께 송계 권응인 선생에게 입문한 뒤로 낙재 서사원을 거처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선생은 28세에 금호선유(琴湖船遊)에 참여하니 학문이 순정(醇正)하여 세인(世人)이 추중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는 모당 손처눌 등과 함께 창의하여 구국의 의병대를 조직했으며, 종제들과 함께 낙재 서사원을 위한 이강서원을 건립하고 선생을 봉안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후학양성에만 힘쓰다가 1640년 1월 3일 67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부인 여흥이씨(驪興李氏)사이에서 5남 4녀를 두었다. 선생의 호 서재(鋤齋)는 ‘호미질 하는 집’이란 뜻으로 농사짓는 가운데 안락하며 영달을 구하지 않으려는 뜻일 것이다. 선생의 호는 서재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달성십현(達成十賢)으로 추앙되고, 대구읍지에 소재(昭載)되어 있으며 용호서원에 배향 되었다.
도신수(都愼修, 1598~1650) 자는 영숙(永叔), 호는 지암(止巖)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무공랑(務功郎) 서재 도여유(都汝兪)와 여흥이씨(驪興李氏)의 모친 사이에서 1598년 8월 14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일찍이 양직당에게 수학하고 8세에 낙재 서사원에게 소학을 배우며 입문하였고, 이후 한강 정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27세에 진사시를 거쳐 29세에 문과 별시(別試)와 다음해 명경과에 급제했다. 이어 관직을 성균관학유, 숭문원박사를 거치고 33세부터 참례찰방, 전적(典籍), 형조좌랑을 역임하고 다시 충청도사, 호조정랑, 성균관직강 등 역임했다. 37세 함흥판관 재임 시는 원옥판결(寃獄判決)로 거사비가 세워지고, 42세에 귀향하여 지암정(止巖亭)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이강서원이 낙성함에 낙재 서사원의 봉안문을 작성하였다. 43세에 서흥부사를 거쳐 46세에 5년 동안 재위한 울산에서는 향약(鄕約) 8조를 제정 실시하고 어업을 진작시키며 구휼미 비축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여 선정비가 세워졌다.
1648년 돌아와 이듬해 인조의 국상(國喪)에 나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 1650년 외직을 청해 영해부사로 나갔으나 그해 12월 11일 병에 들어 임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지암 선생의 시문은 지암집(止巖集) 6권 2책으로 전하는데, 권두에는 1784년 정범조(丁範祖, 1723~1801)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는 이희발(李羲發, 1768~1849)의 발문이 있다. 부친 서재 도여유와 함께 용호서원에 배향되었다.
서호병(西湖屛) 지역 강학활동 중심지 용호서원 16세기 낙재와 한강의 강학활동을 계승한 대구지역 유생들은 17세기 북쪽의 연경서원, 서쪽의 이강서원, 동남쪽의 청호서원에서 강학하며 대구유학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낙재와 한강 사후 강학의 중심지는 모당 손처눌(孫處訥) 선생 쪽으로 세가 옮겨갔다. 그러나, 서호 지역에서도 양직당 도성유 선생이 1621년(광해 13)에 와룡산 기슭에 와룡정사(臥龍精舍)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이후 양직당의 뒤를 이은 서재선생의 둘째 아들인 휘헌(撝軒) 도신여(都愼與) 선생이 당시 첨예했던 예송으로 출사를 삼가고 향리에 돌아와 이 와룡정사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668년(현종9, 64세)에 연경서원(硏經書院) 원장을 역임하며 대구유학의 강학 전통을 이었다.
1704년(숙종 30)에 세덕사(世德祠)로 건립되었다가 1707년(숙종 33)에 서원으로 승격한 용호서원(龍湖書院)은 이강(낙재)과 사수(한강)를 잇는 연결고리로 ‘서재문화’의 중심지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용호서당(龍湖書堂)으로 개칭되었지만, 이락서당과 함께 마을의 후진을 육영하는 교학장으로 사용되었다. 용호((龍湖)라는 명칭은 와룡산과 금호강이 있는 서원의 지리적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서원의 경내는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서원의 강당인 용호서당(龍湖書堂)이 경사면의 상단에 있고, 하단에는 대종회 제사 공간인 치경당(致敬堂)이 위치한다. 서원으로의 출입은 용호서당의 동쪽에 있는 입덕문(入德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대문채인 입덕문 앞에는 용호서원유적비가 서 있다.
2014년 신축한 서당은 이중치마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앙의 2칸 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는 안인재(安仁齋)를 서쪽에는 정의재(正義齋)를 배치하였다. 강당의 오른쪽에는 용호서원묘우중수상량문이 걸려 있고, 그 왼쪽에는 용호서원 현판과 용호서당기 현판이 자리하고 있다.
| | | 용호서당 내 동쪽 안인재(安仁齋)를 가르키는 도석갑 대종손 | | |
양직당공파 31세 도석갑 종손은 "용호서원이 자리한 서재는 동서로 와룡산과 화개산, 궁미산이 휘감고 금호강이 둘러진 와룡포란형의 명당으로 470여 년간 지역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다"며, "사우(祠宇) 건립 등 서원의 완전한 복원을 통해 선조들의 학문적 맥을 잇고, 지역문화 발전에 보탬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도신수(都愼修)
염권이천월(廉捲伊川月) 주렴 걷으니 이천의 달 보이고
헌개사수풍(軒開泗水風) 문 열자 사수의 바람 불어오네.
궁장지불원(宮墻知不遠) 궁장은 멀리 있지 않은 줄 알겠으니
면앙차암중(俛仰此巖中) 이 가지암 가운데에서 한가히 노니노라.
참고문헌 : 대구지역 서원 현황조사결과 보고 자료
팔거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