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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재물보다 소중함을 일깨워 준 진사(進士) 신석용(申錫龍)

등록일 2014년04월22일 21시35분
사람이 재물보다 소중함을 일깨워 준 진사(進士) 신석용(申錫龍)
 
 신석용(申錫龍, 1817~1876) 선생은 달성군 다사읍 매곡리(梅谷里)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경순(景純), 호는 쌍고(雙皐)이며, 헌종12년(184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 1825~1905) 선생과 교유하였다. 선생의 묘는 다사읍 문양리 윗서부실에 있으며, 묘갈명(墓碣銘)은 시헌 채황원(時軒 蔡晃源) 선생이 찬(撰)하였다.
 선생의 시조는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팔공산 전투에서 고려 태조를 구하고 전사한 신숭겸(申崇謙, ?~927) 장군이며,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공민왕 3년(1354)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역임한 신호(申浩, ? ~ 1432) 선생이 중시조이다. 평산 신씨 매곡 입향조(入鄕祖)는 낙은처사(樂隱處士) 신용부(申用?,1510~1585) 선생이 된다.
 철종7년(1856) 선생은 동생 석구(錫龜, 1819~1890)를 시켜서 배에 쌀 수백 섬을 싣고 부산항(釜山港)에 가서 내도록 하였다. 마침 낙동강 상류에 큰 비가 와서 하류로 큰물이 내려 올 때 동생이 탄 배는 부산으로 향하여 지금의 달성군 논공에 이르렀다. 강가에 있던 큰 마을 하나가 온통 물에 뜨고 잠겨서 남녀 수십 명이 한쪽 언덕에 모여서 아우성을 치며 구조 요청을 하는 것을 목격한 동생 석구는 급히 명하여 배에 실었던 쌀을 강에 모두 던지게 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였는데, 한 사람도 죽은 자가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온 동생이 그 형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였더니 선생은 기뻐하면서 “이 사람이 참으로 내 아우 이구나!”하였다 한다. 선생은 가난해졌으나 종신토록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한다.
 이와 같은 미담은 1951년 창녕 사람 도산 성순영(濤山 成純永) 선생이 다사 매곡에 찾아와서 “이곳이 옛 신진사의 마을입니까? 병진년(1856) 홍수 때 사촌(砂村, 논공읍 남리)마을 사람 수백 명이 신진사 형제에 힘입어 목숨을 건졌어, 사촌 사람들은  신진사의 은덕을 기리는 공덕비(頌德碑)를 세웠다합니다. 지금으로부터 95년이 되었지만 사촌의 노인들은 오히려 그 의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거늘, 신진사 형제의 고향인 매곡에서는 아직도 그를 드러나게 찬양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인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곧 신진사의 증손(曾孫)을 찾아가서 묻기도 하고, 문중노인에게 묻기도 하였으나 그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었다.
 도산 성순영 선생은 군지(郡誌) 음덕편(蔭德篇)을 찾아 신진사의 선행 기록을 찾아 비로소 그 증거를 얻어 문자를 소홀히 여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후세에 신진사 형제의 의로운 사실을 영원히 전하고자 하였다. 성순영 선생은 당시 다사초등교장 김성경 선생을 비롯하여 다사지역의 지식인 채덕수·정영우·김수용·신윤균·김충식·허정·정호종·변도식 선생 등과 「성균진사평산신공형제기념사업회」를 결성하여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신진사형제 기념사업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63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고 더욱더 잊혀진 미담이 되어가고 있다. 신진사 형제의 미담은 158년이 지난 과거에 일이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재물보다 소중함을 일깨워 준 신진사 형제의 미담을 후세에게 전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책무이다. 선생의 5대손인 신상조씨는 다사읍 매곡리에서 고향을 지키며 이장(里長)으로서 선행 봉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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