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당선인 "정치적 고향" 달성군
지역구 물려받은 이종진 의원 그물망 선거운동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있게 한 "정치적 고향"은 대구 달성이다.
그는 1952년 2월 대구시 중구 삼덕동에서 태어났고 이듬해 서울로 옮겨갔다. 대구 삼덕동과 인연이 1년이 안된 짧은 시간이였다. 한때 교수를 꿈꾼 대통령의 딸이 한국의 첫 여성대통령이 되기까지 박근혜 당선인이 걸어온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흉탄에 부모를 모두 잃고 사람들의 기억속에 사라진 박근혜를 세상에 다시 불러낸 것은 경제 국치인 IMF였다.
1997년 11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대선 유세를 하면서 정치에 입문해, 이듬해 4월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달성군 후보로 출마해 당선,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를 떠난지 45년만의 귀향이였다.
IMF 환란속에 당시 여당인 국민회의는 달성군 출신의 엄삼탁 후보를 내세워 전폭 지원했다. 당시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배해 첫 정권을 야당에 내준 후 당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보궐선거였다. 선거 초반 여당후보의 조직과 자금력을 앞세운 일방적인 독주가 예상되었으나 박근혜 당선인은 하루 10만보를 걸으며 유권자와 직접 만나는 바닥민심에 직접 호소하여 선거를 완승으로 이끌며 달성군과 첫 인연을 맺었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18대 국회까지 달성에서만 내리 4선을 하며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영남권 친박 의원들이 친이 계열에 밀려 공천에서 무더기로 탈락했던 18대 총선에서 친박 부활의 중심축 또한 달성이였다. 박 당선인은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며 한나라당의 공천을 강력 비판하고 서울에서 달성으로 내려와 무려 17일동안 머무르며 지역구 곳곳을 누볐고, 그의 행보에 따라 대구를 비롯한 영남권에서는 친박 바람이 거세게 일었다.
박당선인의 정치인생은 한마디로 구원투수였다. 2004년 차떼기 당의 오명과 탄핵역풍 속에서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의 천막당사로 들어갔다. 친몰직전의 한나라당을 17대 총선에서 121석의 선전을 거두며 기사회생했다. 이후 2년3개월간 당 대표를 지내면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5차례의 국회의원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40대0의 완승을 거뒀다. 그의 재임 기간 여당 대표는 8명이 바뀌었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박 당선인은 지난 2월 선거 지휘 등을 위해 지역구 출마를 포기하고 비례대표로 나섰다.
당시 달성군민들은 박 당선인에게 "더 큰 정치에 헌신하라"고 당부했다. 이에 그는 "저를 정치에 입문하게 해준 정치적 고향이 달성군"이라며 "지역구민 여러분의 뜻을 따라 더 큰 정치에 몸을 던지기로 결단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10개월만에 대통령 당선으로 "큰 정치를 하라"는 지역구민의 뜻을 이뤘다.
박당선인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이종진 국회의원은 이번 대선기간 지역을 그물망처럼 누비며 선거운동을 했다.
이 의원은 “박 대통령 당선인은 공약한 대로 갈라진 민심을 대통합하고 국민이 100%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이라며 그는 “대구의 지역내 총생산(GRDP)은 18년째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며 “변변한 대기업 하나 없는 대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존 산업단지와 국가산업단지 등을 도심과 연결하는 도시철도의 건설을 통해 기업하기 좋은 도시가 되도록 해야 한다. 박 당선인께서 달성군 국회의원으로서 지역 발전을 위해 필요한 좋은 정책을 많이 구상하고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1995년 대구시로 편입한 달성군은 시내 8개 기초단체 가운데 유일한 군 단위로 3개 읍, 6개 면에 19만여명이 살고 있으며, 낙동강벨트의 중심축으로 대구사이언스파크, 테크노폴리스, 첨단산업단지, 달성지방단지 등 향후 첨단과학기술지역이자 대구경제의 중심축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