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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우보 그리고 우보 _ 우보 만보(漫步)

등록일 2026년04월28일 11시41분

우보 그리고 우보 _ 우보 만보(漫步)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수필가 , 하종혁 수필가 _ 하종혁

 

우보’, 십수 년 전에 스스로 지은 호. 치기 넘치던 고등학생 시절에 몇몇 친구와 자를 지어 장난삼아 부른 적이 있으나,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 새삼스레 호를 갖게 된 것은 우연찮은 계기로 이루어졌다. 호란 모름지기 자신을 낮추어 불러야 한다는 말을 좇아 우보라 부르기로 했다. ‘어리석은 사내라는 뜻인데, 지난날의 내 삶의 궤적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 같아 오래 고민하지 않고 그리 부르기로 했다.

 

어느 날, 친구가 말했다.

보게, 굳이 우보(愚甫)라고 할 건 뭔가. 우보(牛步)라고 쓰면 낫지 않아?”

난들 그런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소설가 민태원(18941934) 선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牛步라는 호를 이미 쓴 바 있고, 지금 내 주변에도 그 호를 가진 분이 여럿 있음을 아는지라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속내를 솔직하게 말하면 소의 후덕한 품성에 나를 빗대는 것이 언감생심인 것 같기도 하였다.

 

일찍이 소를 칭송한 글은 많다. 선종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데 비유한 그림을 심우도(尋牛圖)라 하고, 최근에는 소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 이광수의 수필 우덕송(牛德頌)’이 압권이다. 그는 소의 울음소리, 꼬리질, 새김질, 걸음걸이, 성냄, 짐 지고 가는 모양, 밭갈이, 심지어 도살되어 피와 살을 모두 인간에게 바치는 운명까지 소의 갖은 덕성을 조목조목 말하고는 마침내 소는 짐승 중의 군자다.’라고 끝을 맺는다.

 

우생마사(牛生馬死)’라는 말이 있다. 소와 말은 헤엄을 잘 치는 동물인데, 그 속도는 말이 소보다 곱절은 빠르다. 그렇지만 급한 물살에서는 이야기가 아주 달라서 소는 살아서 나오지만, 말은 빠져 죽고 만다. 왜 그런가. 말은 헤엄에 자신이 있어 거센 물살을 한사코 거슬러 오르다가 마침내 지쳐서 헤어 나올 수 없게 된다. 그렇지만 소는 흐르는 물살에 등을 지고 몸을 맡긴다. 그렇게 떠내려가면서 조금씩 물가로 다가가 얕은 곳에 발을 딛고는 유유히 걸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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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牛步千里라는 말도 있다. 사노라면 초원을 질주하는 말처럼 거침없이 내달릴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손쓸 새 없이 급류에 휩쓸릴 것 같은 고비에 처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미련하다 싶을 만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과,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옳다면 황소걸음 마냥 쉼 없이 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느려도 뚜벅걸음이 지름길이라는 말이 생긴 게 아닐까.

 

소는 몰아야 가고, 말은 끌어야 간다는 말도 있지만, 끌어야 할 때와 몰아야 할 때를 알기는 어렵다. 채근담일이 어려워지거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항상 이치와 사리에 맞게 돌아가지도 않거니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도 나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데 70년 걸렸다.’고 하지 않았던가.

 

얼마 전에 서른일곱 해 넘게 다니던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요즘엔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새삼 또렷하게 보이고, 덕분에 시간은 전에 없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일상과 맞닥트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머잖아 시간은 더 빠른 가속으로 내달리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신선하게 느껴지는 하루하루지만 머잖아 그 일상이 쌓여 또 다른 궤도를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한 폴 발레리(18711945)의 말이 귓전을 크게 울린다.

 

팍팍한 성정 탓에 여태껏 옹색하게만 살던 위인이 뒤늦게 소의 넉넉한 품성을 닮으려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사실 가소롭다. 그렇지만 우생마사, 우보천리를 거듭 되뇌며 뚜벅뚜벅 내쳐 걸어 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어리석은 사내라고 쓰고, ‘소걸음으로 읽는 날과 마주하기를 감히 고대하는 것이다.

 

#우보 #하종혁 #수필가 #우보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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