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 만보(漫步) ; 도(道), 동(東)으로
서원 가는 길도 많이 변했다. 예전엔 현풍읍에서 도동서원을 가자면 낙동강을 오른쪽에 끼고 강벼랑에 바싹 붙은 오솔길 이십 리를 걸어야 했다. 그 길이 위태로워 사십여 년 전에 고갯길을 새로 닦았다. ‘느티골’과 ‘정수골’ 사이의 대니산에서 뻗어 내린 산등성이가 다람쥐를 닮아 ‘다람재’라 했다고 마루터기의 표석에 새겨져 있다. 거기다 구지면의 여러 마을을 더터 돌아가는 버스길을 따로 두고, 최근에 널찍한 길을 새로 닦아 다람재 아래로 터널까지 뚫었다. 그러니 초행인 이는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힘들여 오를 리 없고, 다시 찾는 사람이나 기억을 더듬어 천천히 옛길을 밟는다. 이제는 한달음에 서원에 닿으니 그 여정이 오히려 싱거워졌다. 서원 가는 길이 가까워지는 만큼 마음은 되려 횅해지는 건 뭔 연유인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동서원의 은행나무 앞에 섰다, 비록 노구에다 육중한 콘크리트 목발을 여럿 짚었어도 서원을 상징하는 나무로서 위세가 여전히 늠름하다. 도동서원은 ‘도학지종道學之宗’으로 받드는 한훤당 김굉필(1454∼1504) 선생을 모신 곳이라 이름도 ‘김굉필나무’다. 이 나무는 한훤당의 외증손인 정구(1543∼1620) 선생이 서원을 재건한 기념으로 심었다니 연륜이 사백 년은 거뜬하고,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온 곳’이라는 서원의 이름에도 잘 어울린다.
은행나무 뒤로 수월루水月樓가 떡하니 서 있다. 서원의 정문이면서 휴식을 위한 공간인데, 누마루에 오르면 넘실대는 강물과 아기자기한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이 후련해진다. 그렇지만 이 누대는 서원이 건립되고 한참 뒤에 들어섰고, 그마저 불탄 것을 오십여 년 전에 한 층을 높여 다시 지었다. 그러니 실없이 큰 데다가 화려한 단청으로 치장하여 격조 있는 다른 건물들과는 겉도는 것 같다. 더욱이 강당에 앉아서 보던 낙동강의 수려한 경관을 가로막았으니, 과유불급이라고나 할까.
수월루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서원의 옛 출입문인 환주문喚主門이다. 계단의 폭이 70㎝에 불과하여 여기서는 누구든 언행을 삼갈 수밖에 없다. 흔치 않은 사모지붕 형태를 한 출입문 또한 높이가 아주 낮아서 드나드는 사람이 머리를 숙여야 겨우 지나갈 수 있다. 작지만 품격 있는 환주문 앞에 멈추어 서서 매무새를 가다듬었을 옛사람이 껑충한 수월루를 본다면 과연 무어라 할 것인가.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은 위엄과 격식을 제대로 갖춘 건물이지만,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여 단정하고 탄탄한 느낌을 준다. 3단으로 된 기단의 돌에 눈길이 간다. 다듬은 돌인데도 뭐 하나 손댄 것 같지 않고, 색깔마저 제각각이라 더한층 자연스럽다. 하나하나는 반듯해도 긴장감이 없어서 마치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조각보 같다. 가에 덧바른 시멘트조차 거리낌이 없으니 그 조화를 뭐라 말할 수 없다. ‘세상 그 어느 것도 홀로 일어나는 일이 없고, 모두가 서로 원인이 되며, 대립을 넘어서 하나로 융합하여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떠올린다. 이러한 경지를 화엄 세계라 한다지.
서원의 담장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옛 마을 돌담길이 국가 지정 등록문화재가 된 예가 드물지는 않지만, 서원의 담장이 보물로 지정된 사례는 이곳이 유일하다. 공부하는 엄숙한 공간과 제사를 모시는 경건한 공간 전체를 높이 두른 이곳의 담장은 여느 마을의 옛 담장과는 확연히 다르다. 맨 아랫단에 진흙을 섞은 막돌을 몇 줄 쌓고, 황토와 암키와를 5단으로 켜켜이 포갠 다음, 중간중간에 별 모양의 수막새를 박아 넣었다. 유교 건축의 엄정한 규범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주변의 환경과 잘 어울려, 우리나라 서원 담장 가운데 으뜸으로 칠 만하다.
다시 수월루에 올랐다. 도동서원이 북동향을 향해 앉은 것은 이곳의 지형 탓이고, 여기서는 낙동강 너머로 고령 땅의 개진들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원래 중정당에서 내려다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쳤다지만, 이제는 수월루가 그것을 대신한다. 서원 앞의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이 새로 조성한 주차장으로 야금야금 채워지고 있다. 고즈넉하게 학문하던 곳이 이제는 분주하게 사는 도시인들이 잠시 숨을 고르는 공간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인간사 풍진 세태를 짐짓 모르는 체하며 낙동강은 오늘도 무심하게 흐른다.
도동서원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