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묫골, 그곳에 사육신의 혈통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네”
- 달성관광 나들이, 제 1코스 ‘육신사’
겨울의 끝자락이 지나가고 봄기운이 밀려오는 요즘, 봄을 맞이할 생각에 벌써 마음이 괜스레 설렌다. 봄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간간이 밤사이를 맴돌다 가기도 하겠지만, 춘심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이에 본보에서는 달성군을 대표하는 레포츠 문화시설 및 나들이 코스를 5부로 나눠 연재하여 소개한다. 그 첫 번째 코스는 달성군 하빈면에 위치하고 있는 ‘육신사(六臣祠)’이다.

육신사가 소재하고 있는 하빈면 ‘묘리(妙里)’는 대구에서 서쪽으로 약 20㎞ 떨어진 마을이다. 묘리는 밖에서 마을을 볼 수 없고 안에서도 마을 밖을 볼 수 없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흔히 주민들은 560년 이상 이곳을 "묫골"이라고 부르고 있다. ‘충절문(忠節門)’을 지나 길 양쪽에는 30여 채의 잘 정비된 아름다운 한옥들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으며, 육신사는 묘리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육신사는 조선시대 수양대군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고, 왕이 되자 이에 불복하고 단종 복위에 힘을 쓰다 목숨을 잃은 사육신(死六臣)인 박팽년,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적은 나무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당시 김질은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 거사를 준비하다가, 동지들을 배반하고 6명의 신하가 반역한 꾀한다며 세조에게 고변하여 사육신사건을 일으켰다.
"하나의 태양 아래서 두 명의 왕을 섬길 수 없다"는 사육신은 세조의 명에 따라 능지처사를 당했는데 조선시대의 능지처사는 칼로 각 부위를 잘라내지 않고 각각의 부위를 수레에 매어 소를 달리게 하는 ‘거열형(車裂刑)’으로 대신했다.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몸은 갈기갈기 찢겼기에 시체를 온전히 수습하지 못하여 현세에도 여러 곳에 그들의 묘가 존재하고 있다.

성삼문보다 한 살 많았던 세조(1417~1468)는 성삼문 등을 죽이면서 “박팽년과 성삼문 등은 당세의 난신이요 후세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세조는 사육신 일가에 대하여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는 하인으로 보냈는데, 마침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는 아들을, 그녀의 아버지이자 제령군수를 지낸 성주이씨의 하녀는 딸을 낳았다. 이들은 두 아이를 비밀리에 바꿔치기하여 결국 박팽년의 아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즉, 사육신 중 유일하게 대를 이은 건 박팽년 뿐이다.

처음 육신사는 박팽년 선생만의 후손에 의하여 배향되어오다가 선생의 현손인 계창공이 선생의 기일에 여섯 어른이 함께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어 놀라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향사를 지냈다고 한다.
본격적인 육신사 관람에 앞서 입구 왼편에는 ‘문화관광안내부스’가 설치되어 있는데 해당 부스에는 대구시 문화해설사가 상시 근무하고 있으며, 친절한 미소와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육신사 및 사육신의 역사적 의미와 묘리에 대한 재미난 일화 등을 설명해준다. 그러므로 별다른 사전 지식이 없어도 육신사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우리의 역사에 대한 흥미 또한 자연스레 유발해 준다.
5~6월의 육신사는 배롱나무의 붉은 작은 꽃이 만개하며, 연못에는 물고기와 연꽃잎이, 마당에는 푸른 녹음이 짙어져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하지만 3월에 방문한 육신사 또한 묫골이라는 별칭만큼 고즈넉하고 그 나름의 멋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필자는 가장 먼저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숭정사(崇正祠)’에 올랐다. 하지만 숭정사는 평소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었으며, 양력 11월 사육신을 기리는 제사를 지낼 때와 단체 관람객이 있을 시 그의 종친이 개방해준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동안 사육신을 기리는 제는 대구시장이 초헌관, 달성군수가 아헌관, 종손 및 유림대표가 종헌관을 지냈는데 작년부터 초헌관은 대구시교육감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인즉슨 박팽년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집현전 학자 출신이므로 초헌관 또한 그들의 숭고한 뜻을 잇고자 교육감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숭정사가 닫힌 탓에 위패를 직접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이를 접어두고 뒤뜰로 향하여 숭정사의 입구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높은 담장 탓에 숭정사의 단청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마치 넓은 앞뜰에는 사육신이 노닐 듯 하였고 건물의 위용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숭고한 충절을 느낄 수 있었다.
또, 곡선의 처마 끝에 매어둔 작은 종은 바람이 나부낄 때마다 울렸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봄의 풍광과 함께 들리는 종소리는 그 어떤 소리보다 맑고 청아하였으며, 한 걸음 뗄 때마다 가지 말란 듯 자꾸 발길을 붙든다.
숭정사 오른편에는 박팽년 선생의 손자인 박일산이 건립한 정자인 ‘태고정(太古亭)’이 자리 잡고 있으며, 보물 제554호로 ‘묫골’ 동네와 역사가 같다. 태고정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가구(架構)나 세부 가공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초익공계의 정교한 구성을 보이고 있어 사적 가치가 크다. 특히 대청(大廳)의 나무기둥은 조선시대 그대로의 것이라 이리저리 쓰다듬어 보면 오래된 양질의 정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편, ‘도곡재(陶谷齋)’는 유형문화재 제32호로 재실로 사용되었는데 소박한 건물 구조로 현재 문화 훼손과 손상으로 사랑채는 잠겨져 있다.
육신사 왼편에는 박팽년 선생의 선친인 시호(諡號)가 문인공이고 호(號)가 한석당인 박중림을 기리기 위한 ‘충의사(忠義祠)’가 자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관광안내부스 왼편으로 0.2km 정도 오르면 ‘육각정(六角亭)’이라는 작은 정자가 있다. 육각정으로 향하는 길은 울창한 대나무가 올곧게 빽빽이 서 있다. 가파른 산길을 5분여 정도 천천히 걷다 보면 육각정이 나타나는데 하얗고 예쁜 정자로 홀로 산을 지키고 있다. 육각정에는 관람객들이 앉을 수 있는 대리석 의자가 놓여있지만 낙후되고 노후 된 탓에 시멘트 칠이 덕지덕지 벗겨져 있으며, 쇠 봉이 녹슬어져 있어 아쉬움을 더했고 빠른 시일 이내에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봄을 맞아 벚꽃놀이와 유원지로 나들이를 떠나는 인파가 많다. 육신사로 향하는 길은 차도 한적할뿐더러 달성군 근교에서도 푸릇한 녹음과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육신사 관람 후에는 문양역의 먹거리 촌을 방문하여 메기매운탕을 먹거나 준비해온 도시락을 나눠 먹으며, 이번 주말 사육신 충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한편, 육신사의 문화해설사는 12월부터 1월까지와 설?추석 연휴를 제외하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있으며, 단체예약 및 문의처는 대구시관광협회(☎746-6407) 혹은 홈페이지(www.daegutravel.or.kr)로 할 수 있다.
배소영 기자(hindor@dsmear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