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분을 높이지 마라
홍의장군 곽망우당 묘소를 찾아서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외세의 침입이 많았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전국에서 의롭게 일어선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백성들이었다. 우리는 이들을 의병이라고 한다.
경남 의령 세간리에서 태어나고 자란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선 대표적인 사람이다.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 | |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 묘역 전경 , 우남희 기자 | | |
이번 지면에서는 곽망우당(1552~1617)의 유언에 따라 작고 평평하게 만들어진 무덤을 소개하면서 의병장의 삶을 재조명하려고 한다.
묘소는 필자가 근무하는 ‘노사평화의 전당’에서 6분 정도 소요되는 구지읍 대구국가산업단지 서남편인 대암리에 자리해 있다. 묘소는 앞서 말했듯 작고 평평하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왜적의 손에 두 왕릉이 발굴 파괴되고 종묘가 불타 버리고 말았는데 신하된 도리에 무덤의 봉분이니 식수(植樹)를 어찌 감히 하겠는가. 내 무덤에는 봉분도 식수도 하지 말라”는 유언 때문이었다.
흔히 죽을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곽망우당의 유언을 보면 그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음이다.
그는 3살 때 진주 강씨인 어머니를 여의었고 계모인 허씨의 손에서 자랐다. 계모인데도 친어머니처럼 섬기고 전쟁 중에도 안전한 곳으로 모시고 다닐 정도로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돌아가시자 비슬산에 안장하고 삼년상을 치르기까지 하였다.
조부인 곽지번(郭之藩)은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아버지 정암 곽월(郭越)은 대간(臺諫), 홍문관, 황해도 감사를 역임했으며 동지사가 되어 북경에 다녀오기도 했다. 삼촌 곽규(赳)는 승정원 승지와 참의, 오촌인 곽간(郭趕)은 통례원 통례, 칠촌 곽준(郭䞭)도 안음현감으로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에서 곽이상·곽이후 두 아들과 딸 유문호의 처 곽씨와 곽이상의 처인 자부 거창 신씨와 함께 일가 5인이 순절하였는데 나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현풍읍 솔례 십이정려각에 가면 볼 수 있다. 이렇듯 곽재우 집안은 그 당시 영남지방의 명문가라고 할 수 있겠다.
| | | 8번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선생 묘소 , 우남희 기자 | | |
곽재우는 10대 중반에 의령과 가까운 경남 산청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세 때 조식의 소개로 외손녀와 결혼했다. 그의 처형은 동강 김우옹 선생의 부인으로 동강 선생과는 동서지간이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상 우도 사대부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뜻에 거슬리는 말이 있다고 하여 미움을 받고 합격이 취소되자 정계 진출을 포기하고 은둔하였다. 40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스로 의병을 조직하여 붉은 갑옷을 입고 활동하며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하였다.
홍의장군이라고 한 그 연유는 앞서 말했듯 아버지인 정암공이 명나라 북경에 동지사로 갈 때 장군이 함께 가게 된다. 정암공이 명 황제로부터 붉은 비단 한필과 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포도를 새긴 벼루 두 개를 선물 받는데 아버지는 여러 명의 아들 중 곽재우에게 전하였고, 장군은 받은 그것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임란이 일어나자 붉은 비단으로 무관의 복장인 격구복(擊毬服)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정암진(鼎巖津)을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켰고,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친 공으로 유곡찰방, 절충장군 겸 조방장이 되었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산성으로 옮겨 밀양을 비롯하여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지만 김천일, 곽준 선생이 전사하자 전력보강으로 육군의 증강을 요구하나 나라에서 들어주지 않고 수군에만 비중을 두어 100여 명의 군대로는 병사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어 병을 청탁하고 사직 장계를 올리게 된다. 조정에서는 장군의 계획도 들어주지 않고 사직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다 당쟁으로 인하여 장군이 존경하는 이원익 선생이 탄핵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자 벼슬자리에 머무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상소를 올린 뒤 임금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벼슬을 버리고 병영을 떠나버렸다.
관리가 사직하고 관을 떠날 때는 반드시 임금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변방의 군무를 담당한 무관은 후임이 온 뒤에 떠나야 하는데 소장(疏狀)을 올림과 동시에 떠났으니 관을 버린 죄를 범했고, 또한 군인은 정치에 간섭할 수 없는데 당쟁의 폐해와 이원익 선생의 진퇴문제를 비판하여 탄핵 받아 귀양 갔다.
귀양살이 3년 만에 석방된 장군은 낙동강 가의 영산 창암에 초당을 짓고 망우정이라 하고 솔잎으로 생식하였다. 그때 지은 시 두 편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辭榮棄祿臥雲山(사영기녹와운산)
영화와 녹을 버리고 구름 산에 누웠으니
謝事忘憂身自閑(사사망우신자한)
세상 걱정 다 잊어 몸이 절로 한가롭네
莫言古今無仙子(막언고금무선자)
고금에 신선이 없다 하지 말라
只在吾心一悟間(지재오심일오간)
내 마음 한 번 깨달음에 있느니라.
下有長江上有山(하유장강상유산)
아래는 장강이오 위에는 고산인데
忘憂亭舍在基間(망우정사재기간)
망우 정자가 그 사이에 있구나
忘憂仙子忘憂臥(망우선자망우와)
망우 선자가 걱정을 잊고 누웠으니
明月淸風相對閑(명월청풍상대한)
밝은 달 맑은 바람 몸이 절로 한가롭네.
광해군이 즉위하여 장군을 용양위부호군에 임명하고 상경을 권한다. 하지만 그는 몸이 쇠약하여 올라갈 수 없음을 상소하여 사직했다. 그때 난처한 그의 심경을 표현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
九載休糧絶鼎煙(구재휴량절정연) 9년이나 먹지 않고 연기를 끊었는데
如何恩命降從天(여하은명강종천) 임금이 부르시니 이 어이 한단 말가
安身恐負君臣義(안신공부군신의) 이내 몸 편하자니 대의에 어긋나고
濟世難爲羽化仙(제세난위우화선) 세상을 건지자니 신선되기 어렵겠네.
광해군 9년(1617), 66세의 일기로 삶을 마친 다음 해, 지방의 사림들이 모여 장군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현풍 가태리에 충현사를 짓고 춘추(春秋)로 제사를 지냈다. 숙종 때 서원으로 고쳐 예연서원으로 사액하였으나 대원군 떼 훼철되었다. 장군을 한 계급 승진시켜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증직하고 충익(忠翼)이란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참고문헌: 홍의장군 곽망우당기념사업회. 1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