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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멘토 방진方震의 후손 구지면 오설리 방 씨 집성촌을 찾아서

등록일 2024년03월05일 21시35분
이순신 장군의 멘토 방진方震의 후손
구지면 오설리 방 씨 집성촌을 찾아서

 세거지(世居地), 집성촌(集姓村), 동족부락(同族部落)이라고들 하는데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화원읍에 위치한 남평 문 씨 세거지를 집성촌이라 하지 않고 세거지라고 하는 것은 적은 수의 동성동본(同姓同本) 사람들이 세대를 계승하면서 거주해온 마을로 오래된 거주지라는 공간적 측면을 강조했지만, 집성촌은 마을공동체를 결속시키고 지역성을 형성하는데 더 의미를 둔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지역은 도농복합지역이라 아직은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마을들이 적지 않다. 이번 지면에서는 구지면 오설리(烏舌里)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온양 방 씨, 군위군파라고 부르는 군위 방 씨를 소개하고자 한다.
‘오설’리는 안산의 지형이 까마귀가 혀를 내민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리(烏里), 밤마(外洞), 대추정(大亭)의 3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밤마는 마을 뒷산에 밤나무가 다른 마을 사람들이 주어갈 정도로 양이 많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오설(오리) 바깥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외동(外洞), 대추정(大亭)은 오리 남쪽에 대추정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서 옛날에 대추나무가 많았고, 대추나무 정자가 있어서 대추정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오설초등학교, 교회, 보건진료소, 마을창고, 양조장 등이 있었으니 대추정이 면소재지였다. 하지만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과 외동을 병합하였고, 현풍군 오설면의 소재지가 달성군 구지면에 편입되는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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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암고택의 영모재 , 우남희 기자
 
                                 
 오리(烏里)는 임진왜란 후 약 420여 년 전 연안(延安) 차 씨(車氏)가 이곳에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 후, 방치원(方致遠) 공이 낙향하여 이곳에 입향조가 되면서 집성촌을 이루었다. 전성기 때는 60여 호가 모두 방 씨로 한강 이남에서는 방 씨의 집성촌으로는 으뜸이었다.
뿌리 없는 민족은 없다. 한 그루의 나무도 뿌리에서 줄기, 줄기에서 가지를 사방팔방으로 뻗는다. 방 씨의 원뿌리는 온양 방 씨라고 할 수 있다.
방 씨의 시조는 신라 문무왕 때 당나라 한림학사인 월봉 방지(方智)다. 그는 설총과 많은 서적들을 저술하여 학자들을 양성하였을 뿐 아니라 신라문화의 기초를 닦고 당의 문화를 전파한 후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신라의 요청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중시조는 온수군 방운(方雲)이다. 그는 후백제 견훤과의 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무공을 세웠다. 태조 왕건을 비롯해 6대 왕인 성종까지 60여 년간 왕을 섬기며 공을 세워 온수군의 봉작을 받아 충남 온양군에 살게 되었다. 온양을 비롯해 신창, 아산을 사패지로 하사받았다.

 군위 방 씨는 온양 방 씨에서 분파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태상경 방적(方迪)이 왜적 토벌군의 책임자가 되어 적을 섬멸한 공훈으로 군위군에 봉작되어 사패지(賜牌地)로 군위현을 받아 군위 방 씨의 시조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온양 방 씨 군위군파라고도 한다.

고려가 망하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왕권을 잡은 다음 학문과 경륜을 고루 갖춘 방 씨들을 중용하려고 하여 관직을 주고자 했으나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 사패지는 몰수당하고 멸족의 위기를 맞게 되어 방 씨들은 이를 피해 전국 각지의 깊은 산골로 은둔하게 된다.

 2023년인 지난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온양 방 씨 학술대회에서 방 씨의 본관인 상주· 신창· 군위 등을 비롯하여 나주· 남원· 김해· 해남 등등이 모두 온양 방 씨로 합본되었다고 발표하였다. 학술자료를 근거로 한다면 오설리의 군위 방 씨 또한 온양 방 씨 군위군파라고 하는 것이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온양 방 씨의 대표적인 인물은 임진왜란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순신장군의 장인 방진(方震)공(公)이다. 물론 일반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방진의 조카들이 무과에 많이 급제하였다. 이순신의 외가 또한 무과집안이었다. 문과를 준비하던 이순신이 무과로 전환하게 된다. 이는 외가와 장인인 방진의 영향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결혼 후, 방진의 집에 머무르면서 활쏘기, 말 타기 등의 무예를 사사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지원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활약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 이면에는 장인인 방진의 멘토가 있었다고 전한다.

 오설리의 입향조는 앞서 말했듯 참봉(달성 마을지 참고) 니암(尼庵) 방치원(方致遠)공(公)이다. 그는 벼슬을 그만두고 대니골(오설리)로 낙향하여 공자의 정신을 따르며 살겠다는 뜻으로 호를 니암(尼庵)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니골에 니암정사를 짓고 후학들을 양성하며 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니암고택 내에 있는 영모재(永慕齋)는 입향조인 참봉 방치원(方致遠), 사헌부 방문걸(方文傑), 통정대부 방문업(方文業)의 추모재사(追慕齋舍)를 위해 1947년에 건립하였다. 오늘날엔 이곳에서 문중 회의를 하고 있다.  
대추정 들에서 많이 생산된 무는 심이 없고, 질이 고우며, 맛이 배와 같아 나라의 진상품이었고, 오늘날에는 군납용으로 무를 재배하는데 4대강 사업으로 그 재배면적이 많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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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지면오설리 , 우남희 기자
 
 
 마을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오설리가 잘 사는 동네였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 약샘이 있었는데 친척들이 약샘을 핑계 삼아 와서는 오랫동안 친척 집에 머물며 민폐를 많이 끼쳤다. 그래서 부자인 방계묵이라는 사람이 그 민폐를 줄이기 위해 약샘에다 개를 묻고 샘을 없애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오설리에는 큰 저수지가 하나 있다. 대부분의 큰 저수지는 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는데 이곳 저수지는 군에서 관리하는 저수지 중 가장 큰 저수지라고 한다.   

 인구 감소에, 농촌인구의 고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오설리도 피해갈 수 없다.
산수 좋고, 공기 맑은 한적한 산골마을 오설리에 고택 체험하러 아이들이라도 많이 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참고자료: 온양방씨 학술대회 자료집 달성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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