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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여행] 하빈 육신사

등록일 2011년07월19일 10시36분

[마을 여행] 하빈 육신사

하빈 가는 길에 논에 모가 팔뚝만큼 자랐다. 푸르름은 언제나 싱그럽다. 이 모들이 비바람과 뜨거운 햇볕 그리고 태풍을 극복해야 가을에 제 몫을 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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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빈에 들어서니 한 할머니가 밭에서 일하고 있다. 들깨를 심고 있단다. 들깨, 들깨가루는 봤는데 들깨나물은 처음 봤다. 자기 밭이 아닌데도 이웃이 안 심고 있길래 나물이 말라 죽을까봐 대신 심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시골 인심은 이렇게 선하고 착하다.

하지만 성실하게 살아가는 하빈 사람에게도 생활에 어려움이 많단다. 하빈에는 시장이 없어서 다양한 반찬을 해 먹기가 어렵다. 고기라도 먹으려면 대구까지 차 타고 나와서 하루를 허비해야 하는데, 농사일에 바빠 그러기가 쉽지도 않다.
또한 하빈에는 참외 농사를 많이 짓고 있는데 그 약 값이 너무 비싸단다. 그나마 수익이 괜찮은 참외 농사도 돈이 별로 없으면 많이 지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강 할머니는 “성주가 참외를 먼저 시작해서 유명하지만 하빈 참외도 맛있다”고 말한다. 하빈 참외는 벌로 수정해서 당도를 높여 만든 ‘하빈벌꽃사랑참외’ 특산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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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에 거의 다 왔나 보다. 충절문이라는 것이 보인다.
‘묘골’ 아름마을에 들어서니 온 동네가 한옥마을이다. 실제 주민이 살고 있다.
 집 안이 궁금하여 들여다봤다. 우와, 옛날 집 형태 그대로다. 화단에 꽃도 심어놓고, 밤에는 대청마루에 앉아서 달을 구경해도 운치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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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에 들어가기 전에 해설자를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김정희 해설자는 대구시 문화관광 소속이며 교대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근무하고 일 년에 한 번씩 가고 싶은 곳으로 신청해서 이동할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자원봉사이다.

김정희 해설자는 “‘사’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대부분 사람이 절(寺)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는 사당(祠)이다. 사람들이 해설을 듣고 나서 ‘아~ 그래서 육신사구나’하며 몰랐는 부분을 알고 돌아갈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정희 해설자는 2002년부터 화원동산, 대구 약령시, 서문시장, 육신사 등에서 활동해오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많고 일본어를 공부해서 주부로서 이쪽 봉사의 길을 찾았다. 특히 2006년 대구와 히로시마 간에 도시 자매결연을 맺었을 당시, 대구 약령시에서 일본 해설자로 활동했을 때가 기억이 많이 남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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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신사 - 사당(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육신사는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돼 숨진 사육신(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김 해설자는 육신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 학자들을 무척 아꼈다. 세종은 아들(문종)이 병약한 것을 알고 평소 집현전 학자들에게 어린 손자(단종)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여 어린 단종이 임금이 되어 종사를 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보냈다.
특히 세종 때 집현전 학자로 있으면서 총애를 받았던 신하들은 이를 가만히 볼 수 없어서 단종 복위를 꾀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참수를 당했다. 그래서 죽어서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를 가리켜 사육신(박팽년, 하위지, 성삼문, 이개, 유성원, 유응부), 살아서 절개를 지킨 여섯 신하를 가리켜 생육신(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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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의 혈육 또한 모조리 참수를 당했는데, 그 중 박팽년의 둘째 며느리가 복중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다. 남자가 태어나면 죽고, 여자가 태어나면 노비로 살도록 결정되어 있었는데 해산하고 보니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무렵 딸을 낳은 여종이 있어 아기를 바꿔서 박팽년의 손자가 살아남게 되었다. 노비 신세이기 때문에 이름을 ‘비’라 짓고 박비라는 이름으로 외가가 있는 경북에서 숨어 살며 지냈다.

세월이 흘러 박비가 17살이 되었을 때 이모부 이극균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처가에 들렀다가 성장한 그를 보고 자수할 것을 권했다. 다행히 당시 임금인 성종은 사육신의 후손인 그가 무사히 살아 있는 것에 기뻐하여 ‘유일하게 귀중하다’라는 뜻을 가진 ‘일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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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산은 묘골에 정착하여 순천 박씨 입향조가 되어 절의묘라는 사당을 짓고 할아버지 박팽년의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그의 현손이 고조부 제삿날 꿈에 다섯 선생이 처참한 모습으로 사당 밖에서 서성거리는 것을 보고 나머지 다섯 신하의 제도 함께 올리게 되었다.

현재는 순천 박씨 30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작년에 사육신기념관도 새롭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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