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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반전】

등록일 2017년02월20일 23시37분

상식의 반전

미스코리아 대회가 최초의 미인대회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예뻐지려는 욕구는 끝이 없다. 특히 여성이라면 더욱 그렇다. 예부터 미색이 뛰어난 여인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유혹을 받았다. 나라마다 미인을 뽑는 행사는 많다. 세계적인 미인대회 중 미스월드, 미스유니버스, 미스인터내셔널, 미스어스를 세계 4대 미인 메이저 대회로 친다.

 

미인대회는 신들의 세계에도 있었다. 그리스 신화의 세 여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가 쓰인 황금 사과를 놓고 다퉜다. 신들의 제왕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다. 황금 사과의 주인이 되기 위해 헤라는 세계의 주권을, 아테나는 지혜를,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주겠다고 파리스에게 제안했다. 젊은 파리스는 아름다움을 더 사랑했기에 아프로디테를 황금 사과의 주인으로 결정했다. 그 결과 아프로디테는 역사상 최초(?)의 미인대회에서 월계관을 차지했다. 파리스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트로이로 데려왔다. 이 때문에 두 도시는 전쟁을 벌였고, 결국 트로이는 멸망하게 된다.

 

대한민국 최고(最高)의 미인대회는 미스코리아 대회다. 당대의 가장 아름다운 미혼 여성이 미스코리아로 선발됐다. 평균 키가 1960년대 156cm, 1970년대 166.4cm, 1980년대 168.3cm, 1990년대 172.9cm로 점점 커졌다. 요즘에는 큰 키에 외적인 아름다움, 지성미까지 골고루 갖춰야 대표 미인이 된다.

 

미국 하버드대 출신으로 이목을 끌었던 2002년 미스코리아 진 금나나는 2010 3월 하버드대와 존스홉킨스대 대학원 3개 박사과정에 전액 장학생으로 동시 합격해 공신(工神) 미스코리아에 오르기도 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TV로 생중계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러나 획일적 미의 기준 강요’, ‘외모 지상주의 조장’, ‘여성의 상품화’, ‘연예계 등용문으로의 전락 등의 논란과 각종 악성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를 풍자한 안티미스코리아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결국 2001 MBC 방송을 끝으로 지상파 중계가 중단됐다. 지금도 대회는 계속되고 있지만 케이블 TV를 통해서만 중계된다. 대중의 관심이 멀어지고, 시대가 변하면서 미의 기준이 달라지고, 슈퍼모델대회 등 수많은 미인대회가 열리고 있는 점도 대회 침체에 한몫을 했다.

 

우리나라 미인 경연대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5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여성 경염대회(競艶大會)가 열렸다. 당시에는 여성의 아리따움을 겨룬다는 의미에서 경염대회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중앙일보(현재의 중앙일보와는 다름)는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경염대회를 개최했다. 미혼 여성일 것, 키는 다섯 자 정도일 것, 키에 맞춰 몸은 깡마르거나 뚱뚱하지 않을 것, 얼굴은 둥그스름하고 복스러울 것, 치아가 반듯하고 하얗게 반짝거려야 할 것, 현모양처로서 품위가 있을 것 등이 심사 기준이었다. 본선에서는 비공개로 수영복 차림의 맵시를 심사했다. 1등의 영예는 숙명여대 재학생이었던 강귀희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강귀희는 우리나라 미스코리아(당시는 미스대한) 1호로 이름을 올렸다.

 

미스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정식 대회를 연 것은 1957년이다. 그해 한국일보가 미스코리아 대회를 주관하면서 제1회 미스코리아 대회가 정식으로 발화(發花)됐다. 대회의 가장 큰 목적은 미국에서 개최되는 미스유니버스 대회에 파견할 한국 대표를 뽑는 것이었다. 첫 미스코리아 대회는 1957 5 19일 서울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렸다. 초대 미스코리아의 영예는 박현옥이 차지했다. 상금 30만 환과 치마저고리, 목걸이, 은수저 등의 부상이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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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 미인을 뽑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한 미녀들


우리나라 최초의 미인대회는 미스코리아 대회다? 글쎄다. 미스코리아 대회의 시점을 경염대회까지 올라가면 1953년이라고 볼 수 있다. 미인대회의 본질을 살렸다거나 대외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정식 미인대회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그보다 앞서 미인대회도 여럿 있었다. 그렇게 보면 1930년 월간 삼천리가 주최한 지상(誌上) 미인 선발 대회가 국내 미인대회의 효시로 칠 만하다. 파인(巴人) 김동환은 독자를 늘리기 위한 방안으로 사진을 통한 미인 선발 대회를 기획했다. 응모자 가운데 대표 미인 1(최정희)을 선정해 표지에 실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미인 선발 대회가 발표되자 삼천리는 불티나게 팔렸다. 1940년에는 일본 여성지 모던니뽄이 일본 황제 기원(皇紀) 2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여성을 대상으로 미스 조선(김영애)’을 선발했다.

 

그 후 지상 미인대회는 사라졌다가 해방 이후 다시 선보였다. 1949년 월간지 신태양이 인기 투표로 미스대한을 선발했다. 예심을 통과한 미인 사진을 크게 확대해 덕수궁 뜰에 전시해놓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심사를 맡겼다. 본선 진출자는 시민 투표로 뽑힌 8명과 인근을 뒤져 전략 공천한 후보자 등 총 20. 아이러니하게도 명동의 다방 마담인 임현숙이 미스대한으로 최종 낙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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