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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의 봄

등록일 2015년03월17일 17시53분

유년의 봄

 

설이 지나고 3월이 오니 봄기운이 턱밑까지 온 느낌이다.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막 그치자 나무는 목욕한 듯 깨끗해진 표피를 드러낸다. 며칠 후면 화창한 햇살에 봄기운을 머금은 연록의 새싹들이 땅을 헤집고 고개를 내밀 것만 같다. 상상만으로도 봄은 내 안에 가득하다.

 

여물동춘(與物同春)’이라 했던가.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듯 사람에게는 인()과 같아 삶을 윤택하게 한다고 했다. 조선 초, 문인 홍귀달은 봄바람이 살살 불어와 훈훈한 남녘의 기운이 백성의 분노를 푸니 초목이 기뻐서 웃으리라.”며 봄을 예찬했다. 봄이 인의 계절이라 모두가 봄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박완서의 소설집을 읽다 말고 잠시 들판을 바라보며 유년의 기억을 더듬는다. 맨발로 벼가 익는 논을 헤집고 다니며 메뚜기를 잡는다. 하굣길에는 보리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판 씨름으로 가방을 들어주는 게임을 즐긴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비 온 뒤에는 도랑에서 미꾸라지를 잡느라 옷은 흙탕물에 뒤범벅이 된다. 숨바꼭질을 즐기던 숲 속에서는 바람이 나뭇잎을 쓰다듬는 소리를 듣는다. 여선생님이 들려주는 동요인 듯 맑고 곱다. 숲 속 키 큰 나무 꼭대기에는 청람 빛 하늘이 걸려 있다. 고요함만이 내 심장 뛰는 소리를 듣고 있다. 오를 수 없지만 그런 하늘이 좋았다. 바람이 꼭대기 나뭇잎을 흔든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는 그곳에서 윙윙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서 야릇한 감흥이 와 닿는다. 미세한 흔들림에 몸을 맡기면 나도 키 큰 나무가 된다. 착하다고 머리를 쓰다듬는 영화 누나의 희고 고운 손처럼 봄바람은 매끈하고 부드럽다.

비 오는 날은 심심하다. 놀아 줄 친구가 없으니 비와 친구가 된다. 툇마루에 누워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눈으로 붙잡아 본다. 추녀 끝에서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마음은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맑아진다. 가벼워진 마음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펴 만화 속의 주인공이 된다. 비가 그치고 화려한 무지개가 걸리며 친구들과 함께 들판으로 달음박질한다. 숨차게 달리는 동안 얼굴에는 작은 물방울이 스친다. 숲 속 바람처럼 무한한 기쁨과 자유를 느끼게 한다. 온종일 산과 들판을 누비며 뛰놀아도, 비를 맞아 옷이 흠뻑 젖어도, 맨땅에 뒹굴어도, 냇가에서 수영하고 고기를 잡았어도 검게 탄 피부는 윤기를 잃지 않았다. 자연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따뜻한 봄날, 어머니는 어린 오 남매의 옷을 벗겨 이 사냥을 나선다. 알몸이 된 동생들은 이불 속에 몸을 감춘다. 맏이인 나는 어머니의 든든한 조수가 된다. 징그럽게 생긴 커다란 이를 발견이라도 하면 금세 눈빛이 달라진다. 두 엄지손톱으로 정조준 한 다음 잽싸게 누르면 이는 지지직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는다. 머리카락이 긴 여동생들은 얼레빗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두피가 얼얼하도록 빗기를 반복해야만 어린 이까지 완벽하게 소탕할 수 있다. 어머니의 선물은 갈아입으라며 주는 내복이다. 뽀송뽀송한 내의에서 봄 향기를 맡는다.

 

연일 봄소식이 날아들지만 반갑지가 않다. 아침마다 전해오는 뉴스는 봄이 무시무시한 불청객이니 조심하란다. 개나리 산수유, 생강 같은 노오란 꽃소식보다는 황사라는 야차가 서둘러 봄을 점령한다는 불길한 소식이다. 그 옛날 황사가 아니다. 중금속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하니 불안해진다. 창가 커튼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누런 황사가 상어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이미 창틈에도 누런 가루로 자신의 영역임을 표시해 둔 터다. 문밖을 나서면 금방 달려들어 삼켜버릴 기세로 집을 외워 쌓다. 벌써 마당 가운데 굽은 소나무는 온통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맥없이 처져있다. 수시로 찾아오는 이 괴물 앞에 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게 고작 마스크뿐이라니, 눈앞에 암담함이 어른거린다.

 

자연은 변함이 없지만, 인간들은 자연을 쉼 없이 흔들어댄다. 울창한 산림을 깎아낸 자리에 회색빛 욕망을 층층이 쌓아 올린다. 미꾸라지, 붕어와 개구리와 물방개가 유영을 즐겨야 할 논과 습지를 메워 공장을 세운다. 돈이 된다면 파헤치고 뭉개고 바빌론 탑을 세우는데 서슴지 않는다. 시커먼 폐유와 오염물질이 뒤범벅된 하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신음하고 있다. 산야 곳곳에는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져 악취가 진동한다. 매캐한 공기에 취한 것일까. 뿔난 하늘은 이성을 잃은 듯 산성비로 인간을 응징하는데 혈안이다. 인간의 욕망이 커질수록 지구의 신음도 커져만 간다. 찢기고 패인 자연이 머지않아 보복하리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돈다. “오늘은 황사가, 내일은 산성비가 내리니 문밖출입을 자제해 달라는 실시간 뉴스가 나올까 두렵다.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돌, , 시내 가차운 언덕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한 윤동주처럼 화단에도 겨울잠에서 깬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릴 모양이다. 지나가던 초등생들이 우르르 몰려와 깔깔대며 휴대폰을 눌러댄다. 해맑은 웃음에서 어릴 적 내 모습을 본다. 봄날 이를 잡았던 그 추억과, 무지개를 쫓아 꿈을 키우던 유년처럼 내 자식, 내 손자까지도 꿈으로 엮어갈 수 있는 화사한 봄을 다시는 맞이할 수는 없는 걸까. 그래도 봄바람에 실어오는 희망의 홀씨가 담긴 인() 같은 봄을 기다려본다.

 

한국문인협회 달성지부장(달성군 안전행정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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