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琵瑟山)
옛날 대구 사람들은 돌 거북을 만들어 대구의 남쪽 언덕에 머리를 남쪽으로 꼬리를 북쪽으로 묻어 두고 연구산(連龜山)이라 명명하며, 연구산을 진산(鎭山)으로 받들며 비슬산의 정기를 받고자 하였다.(連龜山. 在府南三里. 鎭山. 諺傳建邑初. 作石龜. 藏于山脊. 南頭北尾. 以通地脈. 故謂之連龜.) 이런 까닭으로 팔공산도 대구의 영산(靈山)이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는 대구에서 진산(鎭山)은 비슬산이 된다.
비슬산(琵瑟山)은 과거에 다른 이름으로 "소슬산(所瑟山)"·"비슬산(毘瑟山)"·"포산(苞山)"이라고도 불리어서며, 팔공산과 더불어 대구의 대표적인 산으로 대구를 지키는 진산(鎭山)으로 불린다. 비슬산은 대구의 남부 지역과 청도군 각북면·창녕군 성산면 사이에 솟아 있는 산으로 천왕봉(天王峰)·대견봉(大見峰)·조화봉(照華峰)이 있다.
『여지도서』에서는 "조화봉은 비슬산 남쪽 모서리(琵瑟山男角)에 있으며, 대견봉은 비슬산의 가장 높은 산꼭대기(琵瑟山最高頂)이며, 천왕봉은 대견봉과 더불어 한 쌍의 험한 산봉우리를 이룬다(與大見雙峰)." 하였다. 특히, 조화봉은 당나라 승려 일행이 "상봉우리가 중화(中華)를 비춘다."고 말한 적이 있어 민간에서는 "조화봉"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슬산에는 소재사(消災寺)·도성사(道成寺)·속성사(速成寺)·정백사(庭栢寺)·연화사(蓮花寺)·김천사(金泉寺)·유가사(瑜伽寺)·인흥사(仁興寺)·용연사(龍淵寺)·용천사(湧泉寺)·보당암(寶幢庵) 은적암(隱寂庵) 등 많은 사찰이 있었다.
비슬산에는 당대의 걸출한 고승과 명인들이 머무르면서 많은 전설과 시문을 남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신라(新羅) 때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란 두 스님이 포산에 은거했는데 서로 10여 리쯤 떨어져 있었지만 자주 만났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남쪽으로 구부러졌고 관기(觀機)가 도성(道成)을 부르고 싶으면 나무들이 모두 북쪽으로 누웠다." 하였으며,『대구읍지』에서는 신라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선생이 대견사에 머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고려 때는 영헌 김지대(英憲 金之岱,1190~1266) 선생의「유가사(瑜伽寺)」라는 시가 전하며,『삼국유사』의 저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연스님(1206~1289)은 비슬산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도은 이숭인(陶隱 李崇仁, 1347~1392) 선생은 승사(僧寺)에서 여러 편의 시를 남겼으며,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1435~1493) 선생도 비슬산에서 「산중 물이 꺼려서 속세로 흘러가는데(山水厭山塵土去)」라는 시를 남겼다. 쌍매당 이첨(雙梅堂 李詹,1345~1405) 선생이 보당암을 중창한 사실을 기록한 「보당암을 중창하고 법화삼매 법회를 여는 소(寶幢庵重創法華三昧懺疏)」가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특히, 인흥사는 고려 공민왕이 편액을 썼는데, 이도은(李陶隱) 선생은 인흥사(仁興寺)에서 “흥인사(興仁社)가 포산(苞山) 기슭에 있는데, 내가 옛날에 놀 때에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았다. 시주(施主)는 때때로 부처에 예를 하고, 중은 맑은 낮에 앉아서 경(經)을 말한다. 뜰에 서 있는 탑은 우뚝하고 희며, 길을 끼고 있는 긴 솔은 낱낱이 푸르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황금(黃金)의 천상필(天上筆)이 지금도 광채가 빛나는 별빛이 화성(華星) 쏜다” 하였다. 인흥사는 화원창(花園倉)이 생기기 전에는 화원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는 역할도 하였다.
비슬산에는 조화봉에 폐사(廢寺) 된 대견사가 중창이 되고, 천왕봉 표지석이 다시 설치되는 등 뿌리 찾기와 역사 바로 세우기가 진행되고 있으며, 대구의 진산(鎭山) 역할을 제대로 할 대구경북과학기술원(大邱慶北科學技術院)이 비슬산 기슭에 터를 잡고 대구를 비상(飛上) 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향토사학자 최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