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후원하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네이버톡톡
맨위로

대구(大丘)의 역사

등록일 2014년07월17일 16시29분

대구(大丘)의 역사

"대구(大丘)"란 지명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경덕왕 때부터이다. 신라 경덕왕이 757년에 본래 달구화현(達句火縣)이던 것을 대구현(大丘縣)으로 고쳤다. 대구현은 현재 대구시 중구·서구 지역으로 지명에 걸맞게 넓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어서며, 팔리현(八里縣)·하빈현(河濱縣)·화원현(花園縣)과 함께 수창군(壽昌郡)의 속현으로 있었다. 수창군은 현재 대구 수성구·남구 그리고 달성군 가창면 지역이다. 팔리현은 대구 북구 지역과 경북 칠곡군 지역이며, 하빈현은 대구 달성군 다사읍·하빈면 지역이고, 화원현은 달성군 화원읍·옥포면과 달서구 지역이다.
 고려 현종이 1018년에 군현개편을 단행하면서 대구현은 하빈현·화원현·팔리현과 함께 경산부(京山府)에 내속되었고, 수창군은 경주에 내속되었다. 경산부는 현재 성주군(城州郡)지역으로 당시 고령군(高靈郡)과 대구(大丘)·약목(若木)·인동(仁同)·지례(知禮)·가리(加利)·팔거(八거)·금산(金山)·황간(黃澗)·관성(菅城)·안읍(安邑)·양산(陽山)·이산(利山)·화원(花圓)·하빈(河濱) 등 1군(郡) 14현(縣)을 관할하였다. 고려 인종 때에 대구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의성현(義城縣)편을 보면,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의성현(義城縣)을 대구(大丘)에 병합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고려사』 충렬왕 세가편이나 조선시대에 발간한 다른 지리서에는 대구와 의성의 병합에 관련된 기록은 없다. 고려 충렬왕이 인접하지도 않은 대구와 의성을 어떤 연유로 병합시켰는지는 현재로는 알 수가 없다.

 조선 태조는 1394에 수성현·해안현을 대구에 편입시겼다가 그 후 다시 경주에 내주었고, 1414년에 태종이 다시 대구에 수성현·해안현을 내속시켰다. 하빈현은 태종 연간(年間)에 대구에 편입되었다. 대구는 세종1년(1419)에 1천 3백호를 넘겨 군(郡)으로 승격 되었으며, 세조11년(1466)에는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선조는 1596년에 대구 달성(達城)에 석축을 높이고 감영을 설치하였다가 1597년에 혁파하고, 1601년 다시 대구에 감영을 두고 관찰사(觀察使)가 부사(府使)를 겸하도록 하고 판관(判官)을 두었다. 숙종은 1685년에 성주에 속했던 화원현과 밀양에 속했던 풍각현을 대구에 소속시켰다.

  조선에 이르러 대구를 한자로 표기 할 때 "大丘"와 "大邱"로 병용(倂用)해서 사용하게 되는데, 그 이유로는 두 가지 정도로 볼 수가 있다. 하나는 피휘(避諱) 관습에 따른 것이다. 피휘는 군주나 성인 혹은 자신의 조상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중국의 오래된 관습이다. 공자(孔子)의 휘자(諱字)가 공구(孔丘)이니 大丘에 "丘" 자를 사용하지 않고 "邱" 자로 대신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라 ·고려 시기에는 대구가 작은 현(縣)으로 존재 했을때는 언덕 "丘" 자가 별문제가 없었는데, 조선 태조3년(1394)부터 대구가 속현을 거느리며 읍(邑)으로 변모하면서 "丘" 자에 "고을읍(邑-방)"자를 붙였다고 볼 수가 있다.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시대 기록인 『조선왕조실록 』 『승전원일기 』 『일성록』 등을 살펴보면, 태종5년(1405)부터 1900년대 까지 거의 500년 동안 대구 표기를 "大丘" 와 "大邱" 로 병용해서 사용하였다. 대구의 영역 확장(擴張)과 피휘(避諱)의 관습이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大丘"의 사용 빈도가 서서히 줄어들어 1900년 이후 완전히 사라지고 "大邱"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결제하실 금액은 원 입니다.
무통장 입금시 입력하세요
vote_up 올려 0 vote_down 내려 0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경제 사회 정치 세계 만평

칼럼 더보기

기부뉴스 더보기

해당 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