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곡(竹谷)
죽곡(竹谷)은 대구시 달성군 다사읍의 10개 행정리 명칭 중에 하나로 현재 다사의 랜드마크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죽곡지구는 다사의 관문이며, 달성군을 대표하는 지역으로 아름다운 풍광과 택지· 상업지역을 조화롭게 갖추고 있어 대구지역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지면서 신주거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다사읍의 행정리는 죽곡을 포함해서 매곡(梅谷) · 부곡(釜谷) · 문산(汶山) · 문양(汶陽) · 이천(伊川) · 달천(達川) · 박곡(朴谷) · 서재(鋤齋) · 방천(方川) 등 10개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10곳의 마을 명칭은 일제강정기인 1914년에 정착된 것이다.
18세기에 편찬된 『대구읍지』를 보면 죽곡 마을은 강정리(江亭里)에 포함되어 대구부(大丘府) 하빈현(河濱縣) 하남면(河南面)에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다사지역에는 이천리 · 달천리· 박곡리· 방내리· 서재리· 세천리· 강정리· 마곡상리· 마곡하리· 부곡리· 독두리· 지리 등 12개의 행정리를 두었다. 당시의 방내리(方內里)· 마곡리(馬谷里)는 지금의 방천리· 매곡이며, 독두리(禿頭里)· 지리(旨里)는 현재의 문산과 문양 지역이 된다. 그 이후 강정리는 강정리와 죽곡리와 분리되었다가 1914년에 죽곡리로 통합되었다. 죽곡리는 1리(里)와 2리(里)로 구분되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강정마을이 죽곡 2리가 된다.
죽곡 출신으로 조선시대 인물로는 영락 도하(永樂 都夏, 1418~1479) 선생을 꼽을 수가 있다. 영락 선생은 다사지역에서 최초로 문과대과에 합격한 인물이다. 선생의 본관은 성주이며 자는 성보(聖輔) 호는 영락(永樂)이다. 선생은 세조4년(1459)에 문과별시(文科別試)에 장원하였으며, 형조정랑(刑曹正郞)·봉상판관(奉常判官)·자인군수(慈仁郡守)·제주념마사(濟州拈馬使)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사가정 서거정(四佳亭 徐居正,1420~1488) 선생과 교유하였으며, 선생의 문명은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죽곡 마을은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옛날에는 수상교통의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이기도 하다. 죽곡을 자주 찾은 낙재 서사원(樂齋 徐思遠, 1550~1615) 선생은 이천에서 작은 배를 따고 금호강을 내려와 다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매곡 연화(蓮花) 마을에서 연(蓮)을 캐고 이천으로 돌아가다 날이 저물어 죽곡에 배를 정박하고 어점(漁店)에서 잠을 잤다. 그리고 선생은 1594년 2월 12일자 일기에서는 선생이 아침에 죽곡(竹谷)에 왔어 널판지를 무역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죽곡에는 숙박시설과 장터가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낙재 선생과 절친이었던 모당 손처늘(慕堂 孫處訥) 선생은 시 제목에서 "죽곡 병암 아래 배를 대고 서행보와 이별의 술잔을 마셨는데 다시 곽돈부 이름은 대덕, 호는 죽오가 술을 가져와 서로 작별하니 취하여 절구 한 수를 짓다."는 기록을 남겼다. 모당 선생이 낙재 · 죽오 선생과 더불어 강정으로 가는 모퉁이에 배를 대고 약주를 마시고 취하여 지은 시이다. 시에 등장하는 돈부는 죽곡 출신 선비 죽오 곽대덕(竹塢 郭大德) 선생이다. 모당 선생이 죽곡에서 지은 시를 옮겨본다.
來往江湖五日遊(내왕강호오일유): 강호에 왕래하며 닷새를 노니니,
數篇奇語瀉閒愁(수편기어사한수): 몇 편의 기이한 시로 한적했던 근심 쏟았네.
臨分又被敦夫酒(임분우피돈부주): 헤어질 무렵 또 돈부의 술에 취하여,
初旭巖屛繫小舟(초욱암병계소주): 해 뜰녘에야 암병에 배를 매었네.
죽곡은 달성군에서 상주인구와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30번국도와 대구도시지하철이 통과하는 곳으로 명품 강창교와 대실역이 있다. 죽곡을 감싸고 있는 금호강 낙동강에는 잘 다듬어진 수변공원과 강정보·디아크가 있어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죽곡의 뒷산인 연화산(煙花山) 취모봉(醉帽峰)은 다사에서 전망이 가장 좋은 곳으로 팔공산·비슬산·가야산·금호강·낙동강이 조망된다. 죽곡이 지금 비상(飛上)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