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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의 교훈

등록일 2014년05월10일 22시02분
국민방위군사건(國民防衛軍事件)의 교훈
 
 국민방위군은 1950년 10월 중공군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악화되어 가는 전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국민방위군설치법"에 의하여 만 17세에서 만 40세 미만의 제2국민병으로 조직 되었던 군대였다. 1950년 12월 17일 "제2국민병소집령"을 발동, 약 50만 명의 장정들을 전국 각지의 51개 교육연대에 분산 수용하였다. 국민 방위군은 지휘 통솔의 미숙과 부정 · 착복으로 인하여 아사(餓死) · 동사(凍死) · 병사(病死)등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51년 1월 15일 부산에서 피난국회(避難國會)의 추궁으로 2월 17일 36세 이상의 장병들을 귀향시켰으며, 이어 국회의 결의로 소집 약 5개월 만인 5월 12일 완전 해체 되었다. 당시 국회진상위원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유령인원을 조작하여 24억 원 상당 금품을 착복하고 5만 2천섬의 양곡을 부정처분하였다. 이 사건으로 부통령 이시영(李始榮)이 사임서(辭任書)를 냈으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국방부장관 신성모(申性摸)가 사임했다. 국회조사와 별도로 정부에서는 헌병사령관 최경록(崔慶祿)이 진상조사를 진행하여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에 따라 사령관 준장 김윤근(金潤根), 부사령관 준장 윤익헌(尹益憲), 보급 과장 중령 박기환(朴基煥), 재무실장 중령 강석한(姜錫漢) · 박기현(朴基鉉) 등 5명이 그해 6월 고등군법회의에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관내 다사초등학교에도 국민방위군이 수용되었는데, 정확한 수용 인원과 희생자 수는 알 수 없으나 인근 주민 증언에 의하면 많은 희생자가 있었다 한다. 학교 교실을 막사로 사용하였는데, 20평 규모의 교실을 약 200여 명이 거처하는 내무반으로 사용되어서 앉아 있기도 힘들 정도로 잠자리가 열악하였으며,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사병들에게 공급되어야 할 양곡은 관리자들의 총체적인 빼돌림으로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그마저 부족한 양곡은 술과 고기로 바뀌어 관리자가 매일 밤새도록 먹고 마시는데 사용되었다. 당시 다사초등학교에 주둔한 최고 책임자의 계급은 대위로 알려져 있다.
 국민방위군 병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비참하고 암담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일부의 사병들은 몰래 수용소를 빠져나와 이근 동네에서 구걸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자 병사들은 앙상하게 말라갔다. "죽음의 수용소"로 전락된 국민방위군 수용소의 많은 사병들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다 죽어갔다. 당시 희생자들은 고향에 계시는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희생된 병사들은 다사초등학교 인근인 매곡리·부곡리·죽곡리 등의 야산에 아무렇게 매장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의 참담한 희생을 기억하고, 그들의 넋을 위로하며,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게 다사초등학교에 위령비(慰靈碑)를 세워 교육의 장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한다. 국가는 지금이라도 당시 희생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의 가족을 위로하고 보상한다면 당시 희생된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는 국민방위군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사리사욕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가져다주는가를 가르쳐주는 교훈을 남겼다. 이제부터라도 국가는 인재(人災)를 원천적으로 막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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