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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선생과 다사·하빈

등록일 2014년03월29일 14시34분

면암선생과 다사·하빈
 
 면암 최익현(勉庵 崔益鉉 1833~1906) 선생의 본관은 경주,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며 경기도 포천 출생이다. 성리학의 대두 이항로(李恒老)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철종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신창현감·성균관직강·사헌부장령·승정원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면암집이 전한다. 한말 애국지사로 인정받아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생은 1906년 6월 전라도 태인 무성서원에서 각지의 의병을 집결시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인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을 각 고을에 보냈다. 한편 일본정부에 대해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서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에서 400여명의 의병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우다 체포되었다.
 선생은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켜 진충보국(盡忠報國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마도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의 우국애민(憂國愛民)의 정신과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선생은 다사·하빈지역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선생은 고종32년(1895) 하빈역(河濱驛)에서 “河濱驛拈韻共別(하빈역념운공별)” 시를 남겼다. 선생의 시는 선생께서 당시 대구 해안현(解顔縣)에서 하빈역까지 배웅하기 위해 따라온 제자들과 이별할 때 지은 시이다.

  多謝簪?伴(다사잠휴반): 고맙기 그지 없네 잠휴의 친구들이여!
  解炎共見隨(해염공견수): 더위를 불구하고 동행해 주었네.
  莫將閒散跡(막장한산적): 부디 이 한산한 자취를,
  說與俗人知(설여속인지): 속인들에게 말하지 마오.

 하빈역은 옛길의 역원(驛院)으로 금천역(琴川驛)으로도 불리었다. ‘하빈’은 당시 다사·하빈지역 고을 명칭이며, 금천은 하빈현의 마을 명칭이었다. 하빈역은 현재 하빈초등학교와 하빈농협 본점이 있는 인근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하빈현이 다사면과 하빈면으로 분리되면서 현내리(縣內里)와 금천리(琴川里)가 통합되어 하빈면 현내리가 된 것이다.
 선생은 다사읍 문산리에 소재한 영벽정(暎碧亭)에도 글을 남겼다. 선생은 고종37년(1900)에 경주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구에서 우연히 진사(進士) 윤봉주(尹奉周)를 만나 다사 영벽정에 오게 되었다. 영벽정은 윤진사의 선조인 아암공(牙巖公)이 선조18년(1585)에 건립한 정자(亭子)이다. 선생은 윤진사에게 영벽정중수 기문(記文)을 부탁을 받고 5년이 지난 고종42년(1905)에 영벽정중수기(暎碧亭重修記)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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