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가 다사 왕쉰(왕선)에서 쉬어가다
고려 태조는 고려 제1대 왕으로 성은 왕(王)이며, 자는 약천(若天), 이름은 건(建)이다. 877년 송악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의 부하가 되었으나 918년 6월에 궁예를 내쫓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919년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936년에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견훤(甄萱)은 상주 가은현(加恩縣) 사람으로 867년에 태어났다. 본래 성은 이씨(李氏)인데 나중에 견(甄)을 성으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농사를 지어 자력으로 살아가다, 뒤에 집안을 일으켜 장군이 되었다. 견훤은 나라의 기강이 문란하고 도둑의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던 892년 무진주(武珍州)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은 900년에 지금의 전주에 순행하여 그 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고,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였다.
927년 즈음에 세력을 확장하던 견훤은 신라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견훤은 지금의 문경과 영천을 장악하고 경주로 군사를 밀고 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곧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한편 견훤은 신라 왕도를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신라왕은 왕비와 궁녀들과 함께 포석정에 나가 놀이를 하고 있었다. 미리 대피하지 못한 신라왕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다 왕비와 함께 궁성 남쪽의 이궁으로 가고, 시종하던 신료들과 궁녀 악공들은 모두 병사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견훤은 왕을 잡아다 죽이고, 강제로 왕비를 욕보이고 왕의 족제(族弟) 김부(金傅)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그런 후에 왕의 아우 효렴(孝廉)과 재상 영경(英景)을 사로잡고, 또 나라의 보물창고에 있는 진귀한 재보와 병장기, 왕실의 자녀와 기술이 좋은 장인을 빼앗아 돌아갔다.
경주를 빠져나온 견훤의 군사와 경주를 향하던 태조가 이끄는 기병 5천명이 대구 팔공산 동수(桐藪)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태조의 정예 기병은 크게 패하여 장수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을 잃고 태조는 간신히 몸을 피했다. 견훤은 이긴 여세를 몰아 방향을 돌려 대목성(大木城)과 경산부(京山府)와 강주(康州)를 약탈하고 부곡성(缶谷城)을 공격하였다.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했던 상황에서 탈출한 태조는 임시 은신처가 필요했다. 팔공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태조는 대구의 남쪽 비슬산으로 향하였다. 비슬산은 팔공산이 마주 보이는 곳으로 태조가 견훤의 군사를 피해 숨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태조는 앞산 은적사·안일사·왕굴 등지에서 숨어 지냈다. 태조는 비슬산(琵瑟山)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 복수의 칼을 갈며, 후삼국의 통일을 맹세하였을 것이다. 태조는 다사 왕쉰(왕선)에서 쉬고 성주를 거쳐 개성으로 환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