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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정사(河南精舍)

등록일 2013년12월21일 10시32분
하남정사(河南精舍)
 
 하남정사는 투암(投巖) 채몽연(蔡夢硯, 1561~1638)선생이 선조36년(1603)에 대구에서 다사 매곡으로 거처를 옮겨와서 지은 정자이다. 왼쪽의 마루는 오망헌(五妄軒)이라 칭하고 오른쪽 방은 매곡유거(梅谷幽居)라 하였다. 선생은 정자에서 성리학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투암 선생의 본관은 인천이며 자는 정응(靜應) 호는 투암(投巖)이다. 선생은 한강 정구 · 낙재 서사원 · 모당 손처눌 · 여헌 장현광 · 우복 정경세 선생 등과 사우(師友) 관계를 바탕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선조30년(1597)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가 방어사(防禦使)로 있던 화왕산성(火王山城)에서 『화왕산성동고록』의 대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다사 마천산에 있으며, 문집으로 『투암선생문집』이 전한다.
 선생은 1636년 11월에 지은 의소(擬疏)에서 “부자들은 방탕하고 사치하지 않음이 없고 외로운 백성들은 기한과 곤궁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군현의 벼슬아치는 이리처럼 백성을 깨물어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짜내며 고을의 토호는 무력으로 고을 사람을 억압하여 강한 이가 약한 이를 잡아먹습니다. 병무를 다스리는 자는 토호를 다스리지 않고 약한 백성만 징벌하며 벼슬아치는 백성을 상도로 인도하지 않고 겁탈만을 시행합니다” 라 하면서 인조(仁祖)에게 국가존망이 달린 열 가지 조목(條目)을 개진(開陳)하고자 하였다.
 투암 선생의 아들인 백포 채무(蔡楙, 1588~1670) 선생은 자는 자후(子後) 호는 백포(栢浦) 또는 귀은자(歸隱子)이며 대구부에서 태어났다. 한강 정구 · 낙재 서사원 · 여헌 장현광 · 석담 이윤우 선생에게서 배웠다. 광해군 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인조 6년(1628)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학유로 기용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고향 대구에서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1645년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어서는 부당한 제도를 개혁하고 세금과 부역을 감면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48년 성균관전적을 지냈으며, 이어서 병조좌랑이 되었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백포문집』 4권이 있다.
 하남정사의 하남(河南)이란 조선시대 면리제(面里制)가 시행되면서 다사지역 면(面)단위 이름의 하나로써 군현(郡縣)을 면(面)과 이(里)로 세분하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시행으로 생겨났다. 당시 다사는 하남면과 하동면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현재 매곡리·죽곡리·부곡리·문산리· 문양리는 당시 하남면 지역에 해당된다.
 하남정사는 인조18년(164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효종3년(1652)에 백포 선생이 중수를 하였다. 11년이 지난 현종4년(1663)에 또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다. 260여년이 지난 1922년에 여러 후손과 향토사림이 함께 도모하여 하남정사를 다시 중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택지개발로 인하여 정사는 다시 사라졌다. 『투암선생문집』에는 매곡유거에 차운한 시와 하남정사 중수를 읊은 시 등 하남정사와 관련된 시문이 있으며, 송준필(宋浚弼, 1869~1943)의 「하남정사중건기」와 정은석(鄭恩錫, 1853~1930)의 「하남정사상량문」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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