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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슬산 대견사와 보당암

등록일 2013년10월02일 23시58분
비슬산 대견사와 보당암
 
대구는 앞쪽으로 비슬산이 뒤쪽에는 팔공산이 둘러져있다. 비슬산(琵瑟山)은 팔공산(八公山)과 더불어 대구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신성시하는 산이며, 대구를 대표하는 산으로 전국적으로 이름난 산이다. 옛날 대구 사람들은 남쪽 언덕에 돌 거북이를 묻고 연구산(連龜山)이라 부르고 비슬산 정기를 받기위해 노력하였다. 요즘 회자(膾炙)되는 대견사와 보당암은 비슬산에 존재했던 절집으로 대구와 관계가 깊은 사찰이었다.
대견사(大見寺)는 신라 헌덕왕이 처음 세운 것으로 중종 25년(1530)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전해주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대견사의 관음이 땀을 흘렸다고 태종 16년(1416)과 세종 5년(1423)에 기록하고 있다. 예종1년(1469)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 현풍현(玄風縣) 승사(僧寺)조에는 대견사(大見寺) · 유가사(瑜伽寺) · 소재사(消災寺) · 도성사(道成寺) · 정백사(庭栢寺) · 속성사(速成寺)는 비슬산에 있으며, 교종(敎宗)에 속하는 사찰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 이후 대견사가 언제 폐사(廢寺) 되었는지의 기록은 없다. 단지 『여지도서』를 통하여 대견사가 1765년 이전에 못쓰게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보당암(寶幢庵)의 존재와 중창의 기록은 1478년(성종 9) 성종의 명으로 서거정(徐居正)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우리나라 역대 시문을 추려서 모은 『동문선』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동문선』에 쌍매당 이첨(雙梅堂 李詹, 1345~1405)이 쓴 「보당암중창법화참소(寶幢庵重創法華三昧懺疏)」가 있다. 이 상소문에는 이첨 본인이 모아둔 재산을 희사하여 터만 남아있던 보당암을 중창한 사실을 적고 있다. 그리고 보당암이 비슬산 위에 있다는 것만 기록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이 없어 현재로는 보당암의 위치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상소문을 쓴 연대 기록은 없어나 이첨이 보당암을 중창한 시기는 이첨이 고려 공양왕 3년(1391)에 현풍을 직접 방문하여 앙풍루(仰風樓) 누각 기문(記文)을 쓴 비슷한 시기가 아닌가 추측은 할 수가 있다.
폐사된 대견사와 보당암의 위치를 고증하기란 쉽지가 않다. 다행히 대견사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지리서에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에서 대견사의 위치를 ‘在琵瑟山南角’이라 하였는데, 이는 대견사가 비슬산 남쪽 모서리에 있다는 것이다. 비슬산 남쪽 모서리는 『여지도서』에서 조화봉(照華峯)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대견사는 바로 조화봉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지도에서나 실제로 현장을 둘러보아도 비슬산 천왕봉 · 대견봉 · 조화봉 중에 조화봉이 남쪽에 있다. 대견사가 조화봉에 있었다는 자료는 『대구읍지』에도 있다. 『대구읍지』 고적(古跡)조에 ‘大見寺在府南省平谷有照華峯’라 하여 대견사는 조화봉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절터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절터를 모아 정리한 자료는 별로 없다. 더욱이 지방에 산재해 있고, 관심이 적은 절터는 더욱더 소외된다. 대구경북에는 역사를 가르치는 대학과 고고학을 연구하는 기관이 많이 있다. 그러나 항상 향토사는 관심 밖이었다.


다사향토연구소장 최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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