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바람이 분다 _ 우보 만보(漫步)
바람은 느닷없이 일었다가 소리 없이 스러진다. 그래선지 일찍이 인간사를 바람에 비유한 사람들이 많았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화랑의 무리를 풍류도風流徒라고 불렀고, 산수의 형세나 방위를 살펴 인간의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이론을 풍수風水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이 삶을 바람에 빗대어 말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소설 『삼국지』의 백미를 꼽으라면 적벽대전을 빼놓을 수 없다. 제갈공명이 동남풍을 불러 조조의 수십만 대군을 일거에 불태우는 광경은 비록 소설 속의 한 장면일 망정 더없이 장쾌하다. 그곳에서는 예전에도 그때쯤 어김없이 사나흘 남짓 동남풍이 불었을 테지만,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던 이 현상을 공명이 포착하여 활용한 것이 적벽대전의 본래 모습일 것이다.
수필가 _ 하종혁
계절을 바람의 다른 모습이라고 한다면, 계절의 순환이라는 것은 결국 바람의 일정한 변화를 이르는 것이다. 습하고 더운 남쪽 공기를 잔뜩 실은 남동풍이 확장하는 계절을 ‘여름’이라 하고, 매서운 찬 공기를 앞세워 북서풍이 거침없이 내려오는 시기를 ‘겨울’이라 부르지 않나. 시인 서정주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나도 이런저런 바람과 함께 좌절하고 또 성장했다.
내가 처음 맞닥뜨린 광풍은 ‘사춘기’라는 이름이었다. 이 회오리바람은 대개는 큰 피해를 주지 않고 그럭저럭 지나간다지만 때로는 강풍을 몰고 와서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한다. 사춘기의 ‘질풍노도’를 겪지 않은 사람이야 없겠지만 나의 그것은 집안의 부도와 아버지의 부재라는 사태와 뒤엉켜 삶의 뿌리까지 뒤흔들어 버렸다. 그리고서는 바람이 흔히 그렇듯이 그 시기가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곧 잠잠해졌다.
장년기에는 누구나 비상을 꿈꾼다. 높고 멀리 날기 위해서는 큰바람을 타야 하는 법이라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쉽던가? 갓 마흔에 접어들 즈음, ‘IMF 외환위기’라는 큰 돌개바람이 덮쳤다. ‘토네이도’라는 고약한 바람처럼 그놈은 우리 집안 전체를 큰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때 우리 형제들은 조조의 해군처럼 한 동아줄에 묶여 있었다. 큰바람에도 덜 흔들리고자 한 일이었지만 그 때문에 우리 다섯 형제는 옴짝달싹 못 하고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바람은 간단없이 불었는데, 거센 바람이든 훈풍이든 이제는 익숙해질 만한 나이가 되고서도 바람은 여전히 두렵다. 머리에는 서리가 내린 지 이미 오래고 그마저 하루가 다르게 성기어지니 거울을 볼 때마다 미간이 좁아진다. 소 멱미레처럼 축 처진 목덜미에 눈길이 닿으면 차라리 눈을 감는다. 다가올 시간은 지난 세월보다 훨씬 더 매몰차게 나를 재촉할 것이다. 마음은 바빠지는데 행동은 더욱 둔해지고, 내가 다가서면 사람들은 한 걸음 더 뒷걸음치는 것 같다. 휑한 가슴에는 쓸쓸한 바람이 감돈다.
늦가을, 요란하게 치장하여 서로 자태를 뽐내던 나뭇잎도 찬바람이 몸속 깊숙이 파고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몸을 내려놓는다. 그들은 주저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자연의 순환에 그냥 몸을 맡긴다. 뒤를 돌아보았다. 한 걸음 물러서 뒤돌아보니 단지 거센 비바람이나 매서운 눈서리만 마주한 것은 아니었다.
언 강이 풀릴 즈음이면 언제나 훈기를 머금은 봄바람이 일었고, 흙먼지가 호흡을 가쁘게 할라치면 새침한 봄바람이 한 움큼 봄비를 몰고 와 대기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처서가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서늘한 바람이 일어 숨을 헐떡이게 하던 삼복더위를 밀어내었고, 이듬해 봄의 혹독한 가뭄을 염려한다면 거세게 몰아치는 눈보라조차 불청객이라 할 수는 없었다. 무자비한 폭군 같던 태풍도 생태계를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어떤 바람이든 괜히 심술을 부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바람이 온종일 몰아쳤다. 불현듯 내 몸과 마음에 난 숱한 상처가 허투루 생긴 게 아니라는 생각이 일었다. 그거야말로 살아온 날들의 선명한 흔적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하루가 다르게 푸석해지는 몸을 부여안고 끙끙거릴 일은 아니겠다. 지난 내 삶이 비록 허접했을지언정 그것을 자양분 삼아 새로운 생기를 얻은 사람이 혹시 있을지도 모르지. 움츠렸던 몸을 추슬러 한껏 기지개를 켰다. 한참 연락하지 못한 친구의 전화번호를 서둘러 뒤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