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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_백후자]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등록일 2025년07월02일 11시31분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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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자_백후자 
 
 
바람도 숨을 죽인 채, 그 진홍빛 무리를 둘러싸고 있다. 

잎은 없다. 오직 꽃만 타오르듯이 피어 있다. 그 꽃은 잎을 모른다.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잎이 돋으면 꽃이 사라지고, 꽃이 피면 잎은 세상에 없다. 한 몸이지만 끝내 만나지 못한다. 사람의 인연도 때론 이와 같다. 

상사화와 석산. 둘은 닮았지만 다르다. 상사화는 여름에 꽃이 피고 석산은 가을에 꽃이 핀다. 상사화는 잎이 떨어진 후 꽃이 피지만, 석산은 꽃이 진 후 잎이 돋는다. 상사화가 연한 홍자색 꽃을 피우는 데 비해 석산은 진홍색 꽃을 피운다. 그럼에도 이 둘을 혼동하는 이유는 다름보다 닮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상사화와 석산은 꽃 모양이 비슷하고 두 식물 모두 수선화과에 속한다. 상사화는 개가재무릇, 석산은 가을가재무릇이라 불리는 무릇꽃 종류다. 간혹 석산이라 불리는 꽃무릇 축제장에 가보면 상사화가 섞여 있다. 그리고 상사화 축제라 하여 가면 실제론 석산 꽃무릇이 가득하다. 둘의 가장 큰 특성이 꽃과 잎이 함께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몸에 나되 함께하지 못하는 애틋함이 긴 꽃대에 서린다.

충남 금산에 자리 잡은 보석사에 들른 적이 있다.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채굴한 금으로 불상을 빚어 만들었다고 하여 보석사라 일컫는단다. 과연 이름만큼이나 빛나는 곳이더라. 가을날, 이곳을 찾아 일주문을 들어서면 길 양쪽으로 석산 군락이 절 앞길까지 붉게 이어진다. 오래전 붉게 타올랐던 의병의 의연함이 묻어나는 길이라서 그런지 꽃이 더 붉다.

석산 군락이 끝나는 지점에서 조금만 더 가면 천연기념물인 은행나무가 천년의 세월을 지키고 서 있다. 무수한 세월 동안 별별 일 다 겪으며 문드러진 속이 얼마였을까. 인내하며 지켜온 세월만큼 천지의 도가 느껴진다. 몇 아름은 되어 보이는 밑동 둘레에 소원지가 빼곡하게 걸려 있다. 이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 역할은 물론,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울음으로 소리 내어 알렸다고 한다. 그곳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초자연적인 기운이 감싸 안는 듯하여 섬뜩하면서도 신비롭다.

무엇보다 가장 눈길을 끈 건 절 입구에 세워진 의병승장비다. 보석사가 임진왜란 당시 승병 훈련 장소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의병승장비는 1592년 8월 18일에 치러진 제2차 금산 전투에서 의병장 조헌과 함께 순절한 영규 대사와 승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일제강점기인 1940년 일본 경찰에 의해 부서지고 훼손된 바 있으나 1945년 광복 이후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두 손 꼭 모으고 고개 숙였다.

의병승장비, 우연한 만남이었다. 준비 없는 만남이라 그런지 여운이 더 길었다. 치열하고 참혹했을 그날의 전투가 아프게 다가왔다. 가슴 한구석이 뜨끈해지면서 뭉근했다. 나라 사랑이 남달라서라기보다는 이끌림이었다. 의병장 조헌, 승병장 영규 대사, 그리고 무수한 의병과 승병. 비록 만난 적은 없지만 민족적 본능이 거센 반응으로 끌어당겼다.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멀찍이 바라보았다. 길가로 빼곡한 석산에 그분들의 충심이 깃든 것일까. 꽃잎이 불꽃보다 붉고 꼿꼿했다. 

화르르 피어오른 붉은 꽃 석산. 화려해 보이나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빨강도 주황도 아닌 밝은 선홍빛이다. 외로우리만치 긴 꽃대 끝에 핀 꽃송이가 당당하고 위엄있다. 꽃이 지면 꽃의 당당함과 위엄을 이어받은 짙은 녹색 잎이 장엄하게 돋아난다. 비록 꽃이 잎을 볼 수 없고 잎이 꽃을 볼 수 없다지만 석산의 운명은 하나의 공동체로 단단하게 엮였다. 

한 줄기에 난 몸이다. 꽃은 잎을 위해 지고, 그들은 미래를 살아갈 후손을 위해 몸 바쳤다. 살아생전 인연을 맺은 적 없지만 한 줄기를 타고 태어나 이어진 끈이다. 그 끈의 고리가 참으로 묘하다. 그곳에 세워진 의병승장비 앞에만 섰을 뿐인데 저절로 가슴이 뜨거워지니 말이다. ‘고맙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몸속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마음을 조심스레 꺼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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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산은 일명 꽃무릇이라고 불리며 비슷한 상사화와 다르게 붉은색을 띤 꽃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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