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도, 출발!
30도를 웃돈다. 쨍쨍한 날씨에 땀이 샘솟듯 한다. 영도의 바다가 품었던 바람을 내어준다. 영도의 오랜 역사를 품은 바람이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한없이 유순했을 바람이 안긴다. 바람을 안고 배들이 정박한 해안을 따라간다. 고요한 바다 위로 윤슬이 튄다. 한때는 쉼 없이 분주했던 바닷가 마을이 아닌가.
깡깡이 마을은 영도 본섬에서 툭 튀어나온 낚싯바늘 모양의 작은 땅이었다. 원래의 이름은 ‘풍발포’로 ‘바람이 이는 것처럼 기운찬 형세’라는 뜻을 지녔다. 또 대풍포(大風浦)라 하여 ‘바람을 기다리거나 대비하는 포구’라 불리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풍포는 대평동(大平洞)으로 바뀌었는데, 크게 평안하길 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대평동엔 사연이 참 많다. 임진왜란 때 끌려갔던 조선인이 되돌아온 마을. 일제강점기·해방 후·한국전쟁 후에는 먹고 살길이 막막한 이들이 전국에서 모여든 마을. 산업화 시기에는 연근해 및 원양어선 선원들이 이곳을 찾아와 터전을 잡았고, 지금은 러시아 선원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찾아와 마을의 일원으로 산다. 시대가 보살피지 못했던 사람들을 대평동이 품었고,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며 대평동을 가꾸고 일구었다. 많은 사람이 성실하고 치열하게 살아온 대평동, 깡깡이 마을은 역사만 봐도 분명 특별한 곳이다.
“깡깡 깡깡 깡깡”
수리조선소에 배가 들어오면 망치로 뱃전에 붙은 녹과 해조류를 떼어내는 작업을 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수리조선으로 한창 번성할 무렵, 이 마을엔 깡깡이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길고 요란했던지 멀리 이웃한 마을까지 깡깡 울렸다고 한다. 시끄럽고 거슬리기도 하였으련만 그것이 그들을 살게 하는 힘이기도 하였으니 마냥 싫어할 일은 아니었겠다.
팍팍한 삶에서 가릴 게 무엇이었을까. 무엇이든 해서 먹고사는 게 먼저였다. 아슬아슬하게 목숨줄을 매달고 깡깡이질을 했다. 종일 깡깡이질을 하고 나면 온몸 어디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깡깡이 소리에 귀는 멍하고, 망치질에 손가락·손목·팔목의 관절 마디마디가 저리고 쑤시고 아팠다. 허공에서 출렁거리는 나무판을 딛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썼다. 얼마나 힘을 줬던지 일을 마치고 일어나면 다리가 아프고 힘이 빠졌다. 그들은 그것이 일상이려니 여기며 그렇게 살아왔다.
정박해 있는 높다란 배를 올려다보니 아찔하다. 저 아득한 곳에 매달려 일했을 이들을 떠올린다. 높은 허공이 무서워 놀이기구조차 못 타는 나로서는 엄두가 안 난다.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지기 일쑤다. 또 소음과 진동으로 난청이 오고, 먼지로 인해 기관지가 나빠지고 눈까지 안 좋았다. 눈 안에 쇳가루가 들어가도 손으로 닦아내고 지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일하겠다고 나선 이는 중년여성들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요, 대한민국 조선산업 발전의 주역이며, 산업화의 역군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있었기에 대평동이 수리조선소 마을로 거듭날 수 있었고, 지금 우리가 고요한 마음으로 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게 아닐까.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에서 배를 가장 잘 고치는 곳, 선박의 거대한 몸체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 다른 바닷가 마을과는 소리와 냄새와 분위기가 사뭇 다른 곳, 이곳이 바로 깡깡이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 깡깡이 소리는 곧 밥줄이요 희망이었다. 깡깡이 소리가 요란하면 할수록 마을엔 활기가 돌았고 사람들 마음 온도가 올라갔다.
깡깡이는 생명을 이어준 고마운 일이란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하는 일이지만 그 일로 인해 내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마음 하나면 그만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읜 여인, 배 타고 떠난 남편이 돌아오지 않은 여인, 자식 키우며 살아야 하는데 막막했을 그들에게 희망은 깡깡이였다. 그들에게 깡깡이 소리는 생명의 소리나 다름없었다. 녹슨 배 깡깡이질로 반질반질 매끈하게 손질한 기쁨과 그 대가로 자녀들과 먹고 살 걱정 덜어냈으니 더없는 고마움이었다고 한다.
깡깡이 마을이 크게 번성했을 때는 1970년대다. 원양어업의 붐으로 하루에 4백여 척의 배가 꼬리를 물고 들어왔다니 오죽했을까.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정도라는 말이 나올 만큼 돈이 돌고 돌았다는 얘기다. 돈이 돌아가니 골목마다 선술집이니 다방이 줄을 이어 들어서기도 했다. 대평동이 부산에서 세금을 두 번째로 많이 낸 곳이라 하니 알만하다. 세금을 많이 냈다는 건 이 마을 주민들이 그만큼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의 돈을 벌었다는 얘기다.
어디에나 위기는 있기 마련. 깡깡이 마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1980년대 이후 선박이 대형화되면서 감천항, 울산이나 거제도로 옮겨가면서 차차 빛을 잃었다. 한창 번성기에 들어섰던 공장들도 사상공단과 같은 대단지로 옮겨 가버렸다. 다 가고 없지만 그래도 옛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몇몇은 깡깡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수리조선소도 있고 다방도 눈에 띈다. 분주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윤슬이 톡톡 튀는 바다만큼이나 고요하기만 하다.
영도의 깡깡이 마을. 0도에서 출발하여 100도로 끓었던 마을이다. 비록 그 열기는 식었을지라도 또다시 불을 지피면 활활 타오르는 건 시간문제다. 마을 곳곳에 남아있는 흔적에 예술의 혼을 입히고, 예술마을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 또 시작이다. 0도에서 100도가 되는 그날을 위하여.
깡깡이 마을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