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 따라 삼천리~
대니산의 석문산성과 아들바위 딸바위
구지면은 달성군 최남단에 위치해 있다. 최고봉은 대니산(408m)으로 도동서원에 배향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이 '공자를 받드는 산'이라는 뜻으로 대니산(戴尼山)이라고 했다.
이번 지면에서는 대니산에 있는 석문산성과 전설로 전해져오는 두 바위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석문이라는 말은 절골 또는 사곡리(寺谷里)로 불리는 도동2리 마을 뒤편에 커다란 바위 협곡이 돌문 즉, 석문(石門)으로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가야와 접경을 이룬 신라의 변방지역으로 성을 쌓아올린 흔적이 있던 곳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 곽재우가 석문산성을 축조하게 된다. 이 때 허언심이라는 장군이 적극 찬동하여 쌀 100석을 내어 공역을 도왔다는 기록이 있다.
산성은 마치 띠를 두르듯 산 정상부를 빙 둘러 가며 쌓아 올린 퇴뫼형으로 정유년(1597), 왜적이 재침하자 경상도를 방어하던 곽 장군은 완성되지 못한 석문산성에서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성 쌓기를 중단하고 창녕 화왕산성으로 진지를 이동하게 된다.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전해오는 전설로는 아들 바위와 딸 바위가 있다. 아들이 귀한 사람이 아들 바위에서 정성을 드려 아들을 낳으면 장수가 되고, 딸이 귀한 사람이 딸 바위에 정성을 드리면 딸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다.
아들 바위와 딸 바위와 관련된 비슷비슷한 전설이 여러 개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가
곽 장군이 석문산성을 쌓을 때 주위에 있는 돌을 가져와 쌓지만 성문을 만들 수 있는 돌을 구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바위 딸 바위가 있다는 말을 듣고 휘하의 장군을 시켜 그 돌을 가져오게 해서 깨뜨려 성문을 만드는데 썼다.
그런데 적군이 공격해올 때마다 바위가 넘어져 성문이 열리는 곤란한 상황이 생겼고, 이러한 일로 인해 왜적과 싸우던 장군이 적의 총탄을 맞고 전사하게 된다. 곽 장군은 장군을 장사지내고 결국 군사를 물리게 되는데 후세사람들은 아들 바위와 딸 바위가 영험을 보여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성을 거의 다 쌓고 문을 만들기 위해 돌을 구했으나 이미 근방의 돌이 모두 사용되었고 또 문을 만들 만한 큰 돌이 없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어렵게 돌을 구해 말로 운반하려고 하는데 돌이 워낙 커서 말에 실으려 했으나 균형을 이룰만한 크기의 돌이 없었다. 하는 수없이 말의 한편에는 문으로 사용할 돌을 싣고 반대편에는 작은 돌 둘을 실어 균형을 유지하였다.
문을 만들고자 이 세 개의 돌을 싣고 산성으로 향해 가는데 육중한 무게로 돌을 묶었던 끈이 끊어져 버렸다. 그때 병사들이 떨어지려는 돌을 힘껏 떠받쳤으나 돌은 땅에 떨어지고 결국 문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 후 사람들은 성문으로 사용하려던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고 바위에 박힌 차돌을 떼어 품속에 넣으면 곽 장군과 같은 씩씩한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아들 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지역민들은 성문이 만들어질 자리였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아들 바위인 큰 바위가 하나 있고, 약 10m의 간격을 두고 그보다 작은 딸 바위가 있는데 십여 년 전까지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 | | 〔앞에 큰 바위가 아들 바위, 뒤쪽에 작은 바위가 딸 바위〕 , 우남희 기자 | | |
나머지 하나는 석문산성에서 화왕산성으로 군사를 돌릴 때 석문산에 있던 돌을 화왕산성으로 옮기기 위해 말채찍으로 후려갈기며 바위를 굴려갔다고 한다. 그런데 화왕산성을 다 쌓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돌을 버리고 입성하였다.
대구와 창녕 간의 구 국도변에 커다란 바위가 일렬로 있었는데 지금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땅 속으로 매몰되었다는데 그 바위가 고인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단다.
세 전설 모두가 석문산성의 아들 바위와 딸 바위에 얽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음이다.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닌 일제강점기 때, 오설리에 살았던 주민 고 곽병석 씨가 친구와 함께 마을 뒷산 정상부로 소 먹이러 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소가 풀 뜯어 먹도록 두고 놀다가 솔공이에 걸려 넘어지면서 게임에 져 화가 나 솔공이를 발로 걷어찼는데 쇳소리가 났다고 한다. 파 보니 무쇠 솥단지가 나왔고 그 솥을 엿장수에게 고철로 넘겼다고 했다. 아마도 그 무쇠 솥은 석문산성을 쌓을 때 군사들을 위해 밥을 짓던 솥으로 화왕산성으로 이진하면서 빠뜨린 게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필자의 길잡이로 지역의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곽정섭(72. 구지면 오설리) 씨는 “석문산성의 흔적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아 아쉽다. 이곳을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도 풀이 우거졌을 때는 찾기 힘들다. 이정표라도 세웠으면 하는 마음인데 그것마저 쉽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다.
35년 전인 지난 1989년 석문산성 내에 있던 곽주의 부인으로 곽망우당 장군의 종질부인 진주 하씨 묘를 이장하게 되었는데 그때 미이라가 발견되었다. 편지글 172통과 이불, 의류 등이 수습되었는데 6개월의 유물보존처리를 거쳐 현재 대구국립박물관에 있다.
kbs 역사스페셜로 <400년 전 타임캡슐 무덤 속 편지 172통>, mbc <조선시대 선비의 삶>, 뮤지컬로 <인연>이라는 제목으로 곽주 부부의 사랑이야기를 달성문화재단에서 공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