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최초의 의병장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6세기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이강서원(伊江書院)
고운 최치원, 임하 정사철, 낙재 서사원으로 이어진 강학소
서원 훼철 후 위패를 매안하고 단을 만들어 제향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공산 부인사에서 향회(鄕會)를 열어 대구지역 의병이 결성되었다. 대구읍내 7개의 리(里)와 해안, 수성, 하빈 3개에 현(縣)을 20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향병장(鄕兵將), 유사(有司) 그리고 의병대장(義兵大將)을 두어 대구의 전 지역에 의병을 조직했다. 의병대장으로 임하 정사철을 추대하였으나 임하 선생이 종환(腫患)으로 의병대장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의병을 조직한 낙재 서사원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 | | 이강서원 세연지를 메운 자리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김장헌 기자 | | |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이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위치한 이강서원(伊江書院)이다. 이강은 금호강의 또 다른 이름이다. 땅길, 옛길을 잇고 강안문학과 선유문화를 꽃 피웠던 옛 선사나루터 자리에 북다사IC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내 마을을 옆 대구순환고속도로 터널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댓잎 사이로 이강서원이 있다.
이강서원은 일찍이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 ~ ? ) 선생이 벼루를 씻던 세연지(洗硯池)와 난가대(爛柯臺), 무릉교(武陵橋), 신라고찰 선사암(仙槎庵)이 있던 유서깊은 곳이다. 1587년 임하 정사철 선생이 선사암 옛터에 선사서재(仙査書齋)를 세워 강학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종전 후 낙재 서사원 선생(1550~1615)이 중건하여 선사재(仙査齋)라 하고 강학을 하였다. 금호강 동화천변에 위치한 연경서원과 더불어 대구지역에서 유학의 르네상스 시기를 여는 가장 으뜸 강학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괴헌 곽재겸, 모당 손처눌, 임하 정사철, 양직당 도성유, 사월당 류시번, 양졸재 정수, 서재 도여유, 취애 도응유, 다천 최동률, 대암 최동집, 월곡 우배선, 퇴와 남선, 백포 채무 등 당대의 거유들과 교유하며 강학, 통강(通講)을 실시했다.
1601년 선사재는 찾는 이가 많아 완락당을 새로 지어 동쪽은 경재(東敬齋), 서쪽은 의재(西義齋)라 칭하고 세연지, 무릉교도 새로 세우고, 난가대도 수리했다.
완락당 건립을 기념해 3월 23일 낙재 서사원과 여헌 장현광 등 23명의 선비들이 주자의 어정시(漁艇詩) 오절(五絶)을 분운분자(分韻分字)하여 지은 한시를 짓고, 부강정과 하목정까지 뱃놀이 겸 시회(詩會)를 했던 장면을 그린 그림이 금호선사선유도(琴湖仙査船遊圖) 작품으로 전해진다.
| | | 곡선의 멋을 간직한 이강서원 대들보 김장헌 기자 | | |
서사원(徐思遠)의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이다. 1550년(명종5년) 성주 팔거현 외가에서 출생해 구계선생(徐沉) 7세손으로 그의 부친은 경산전교 서흡(徐洽)이고 모친은 인천이씨이다. 7세에 백부 진사 서형(徐浻)의 후사가 되었다. 그는 17세 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1529~1584)의 문하에 나아갔으며, 이어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1532~1585)과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 1530~1593)에게도 나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28세(1577)에 성주로 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었다. 대구 지역에 퇴계학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성리학과 관련하여 8개의 도설(圖說)과 공부차록(工夫箚錄) 2편의 저술을 남겼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監役), 찰방(察訪),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호조 정랑, 익위사사어, 사헌부지평, 옥과현감(玉果縣監) 등 총 13번 임명 되었으나, 38세 선공감 감역, 46세때 청안현감 두 번만 부임했다. 1863년 이조참의로 추증 되었다. 1615년 66세를 일기로 이천에서 타계했다. 사후 1616년 후학들이 선생의 유고(遺稿)와 서찰들을 수집하여 낙재집(樂齋集)을 간행 했다
1636년 도성유(都聖兪)와 박종우가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도모하여 선생이 강학하던 자리에 묘우(廟宇)를 세웠으나 병자호란으로 1639년(인조 17) 이강서원에 선생을 배향했다. 철종 조(1863년)에 이조참의에 증직이 되었고, 대구 구암서원, 청주 구계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인 '달성십현'에도 올랐다.
| | | 이강서원 매안단에서 바라본 금호강과 세천리 김장헌 기자 | | |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이강서원은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다음해인 1869년 낙재선생의 10세손인 서석원(徐錫元:1852~1893)이 서원터에 위패를 매안(埋安)하고 단(壇)을 만들어 제향하고 있다. 매안단(埋安壇)을 만든 서석원은 字가 순팔(舜八)로 1876년 생원, 1882년 경기전참봉, 1886년 사헌부감찰을 역임하였다
서원의 배치는 강당인 완락당(玩樂堂)과 외삼문인 이락루(二樂樓)가 남북축 선상에 자리한다. 완락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가구는 삼량가(三樑架)이다. 이락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어칸의 지붕을 높인 산형 대문(山形大門)인데, 어칸은 대문으로 사용하고 양측 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 | | 낙재 서사원 선생 14세소인 서보균 성균관 전학과 후손들 김장헌 기자 | | |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던 정월, 낙재선생 14세손인 서보균 성균관 전학과 이강서원을 찾았다. 서보균 전학은 “낙재선생은 학자이자 교육자였지만 국난을 당하자 의병을 조직하여 무력항쟁을 전개하였으며, 지방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공식적 구국 항쟁을 담당하였다. 또 전란 중에도 강학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 전란으로 인한 민심이반을 수습하였다. 선생의 실천적 구국활동은 일신의 안녕만을 추구하고 국가의 흥망을 오불과언(吾不關言)하던 나약한 유학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며, “이와 같은 선생의 정신은 오늘날 혼탁한 사회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며, 후손된 자로써 선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이강서원의 위상을 제고시키며 선생의 유풍(遺風) 선양(宣揚)에 노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 | |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위패를 땅에 묻고 매안단을 만들었다 김장헌 기자 | | |
백포(栢浦) 채무(蔡楙, 1588~1670) 선생이 쓴 낙재 선생 제문(祭文)의 일부이다.
서사원(徐思遠) 선생과 금호의 관계를 가장 잘 설명한 글이 있다.
樂齋先生年譜卷之三 / [附錄]
祭文[蔡楙]
秋月春花。生涯江上一葉船
꽃피는 봄날과 달 밝은 가을 작은 배 하나로 한평생을 보냈네.
| 16세기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 이강서원 | |
참고문헌 : 금호의 고찰(최원관), 낙재 서사원(구본욱)
김장헌 기자(bisul0826@nat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