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이 오면
지금부터 대략 2,000년 전 이곳 신라 땅에선 동짓날은 한해의 시작(歲首)이었다. 동짓날, 붉은색 액막이음식(辟邪食)으로 애기동지팥죽을 끓어서 먹는 풍습이 있었다. 팥죽 속에 새알을 하나 더 먹음으로써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이렇게 소박하고 검소하게 한해를 보내고 가슴 떨리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해를 맞이했다. 그런데 가진 것 없는 백성들에겐 동짓날부터 춥고 배고픈 긴긴밤이 시작되었다.
1950년대 시골, 추운 날씨에 거동이 거북하신 할아버지께선 문을 바르다가 잘라버렸던 창호지조각을 문갑 속에서 끄집어내었다. 풀로 붙이고 묽은 먹물로 매화꽃을 아홉 개씩 아홉 줄을 그렸다. “이것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다. 배 고품과 추위를 녹여서 매화꽃을 피운다.”고 할아버지는 설명을 하셨다. 그리고는 매일 하나씩 매화꽃 밑그림에다가 붉은색으로 매화꽃을 피웠다. 구구소한도에 매화꽃이 만발했을 땐 사랑채 앞마당 할아버지만큼이나 고목이 된 매실나무에도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해맑은 어린손녀의 웃음 같은 매화꽃에다가 몇 번이고 향기를 맡으시던 할아버지께선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 한 번 겪지 않고서야, 어찌 매화꽃 향기가 코를 찌르겠는가?(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搏鼻香)”라고 시를 읊으셨다.
오늘날 경제대국 군사대국 미국도 1924년 장기적 경제침체가 몰아닥쳤고, 기나긴 불황의 터널은 결국 세계대공황이란 재앙을 낳았다. 속된 말로 ‘방귀 잦으면 똥을 싼다.’다. 그러나 국민들의 마음속에 “꽃피는 봄이 오면”을 노래했다. 그게 바로 ‘로키산맥에 봄이 오면(When it’s springtime in the Rockies)’이다. “로키산맥에 봄이 오면, 나는 그대에게 돌아가겠어요. 아름다운 하늘빛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내 연인 로키산맥으로.”라고 소리 높여 노래했다. 그리고 그들은 각종 뉴딜정책으로 경제부흥의 계기를 마련했다.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까지 승리로 이끎으로 당당하게 지구촌 최강대국, 최강경찰로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한편 우리나라는 지난해 국정전반에서 사소하다고 여겼던 상처가 도져 곪아터지고 말았다. 시답잖게 생각했던 ‘찌라시(ちらし)’사건에서 덜 꺼진 불씨가 국정농단사태란 불꽃으로 변했다. 이에 대해 찔끔찔끔 야금야금 대응하더니 결국은 나라 안팎으로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과거 우리나라는 분노를 건전하고 평화롭게 삭이지 못해 쇠파이프와 최루탄을 주고받으면서 집단폭력시위를 벌렸다. 그런 일이 지나갔지만 상처와 후유증이 심각했다. 온 국민들에게 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불경기까지 몰고 왔다. 그러나 이번엔 천만다행히 아픈 만큼 성숙했고, 경제성장 만큼 생각에도 크게 변했다. 국민의 분노와 갈등은 촛불과 태극기로 승화되어 평화로운 축제로 온 나라를 덮었다. 같이 했던 1,000만 명 국민들의 가슴엔 세월이 핥은 흔적엔 온정만 남았다. 이를 밖에서 봤던 세계는 ‘지구상 가장 평화로운 촛불축제’라고 칭송했다.
한편 상처만큼 축복을 주는 법, 민주주의와 경제대국을 향한 성장의 아픔, 국민의 분노가 촛불로 승화, 혹은 100만 송이 장미꽃으로 국가발전을 기원하는 축제였다고. 그래서 춥고 배고픈 긴긴밤을 지세고 나서야 밝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듯이 새해 정유년엔 “코를 찌르는 향기(搏鼻香)”를 가진 매화꽃을 피울 확신을 가진다.
꽃피고 잎 피는 그날이 오면 ‘대통령 탄핵소추’ 심판도 가부를 막론하고 서울 재동에 있는 헌법재판소 앞뜰에 벚꽃이 필 때면 합의된 소식이 날아든다고. 아양을 떠는 꽃보다 짙푸른 녹음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때(綠陰芳草勝花時) 새로운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선출한다고. 약골체질인 우리의 경제도 혹독했던 감기몸살에서 병석을 떨고 일어나 예전의 씩씩함을 보여줄 게다고. 그동안 접어두었던 국제외교도 급변한 정세를 새 부대에 새 술로 숙성시켜 우리의 입맛에 맞게 담글 게다고. 확신에 찬 기대를 한다.
강성환(前 다사읍장)